홍건적 두차례 격퇴로 고려 구한 이방실장군

이방실(李芳實) 1309년(충성왕 원년)∼1362(공민왕 11년). 고려의 무신.
함안 이씨의 조이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원수공의 부친인 이원공(李原公)은 고려 충선왕 원년(1309년) 충청도 안렴사(후에 전임관찰사로 됨)로 재직 중일 때 함안 여항면 내곡에서 출생하였다.

이방실 원수의 어린 시절은 잘 알 수 없으나 부친인 이원공이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향인 함안을 떠나 충청도 관아와 서울인 개경에서 상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원수공은 젊은 시절 용기가 있고 기개가 뛰어 났다는 일화가 있다.

고려 왕조 말기 공민왕 때 중국의 홍건적의 대 부대가 수차에 걸쳐 요동 방면으로부터 압록강을 건너 침입하였다. 1차로 침입한 것은 공민왕 8년이었으며, 4만 명의 홍건적은 갖은 만행을 저지르면서 서경(평양), 용강, 함종까지의 대동강선 이북 지역을 유린하였다.

그 때 이방실 장군은 일선에서 군사를 직접 지휘할 편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전쟁 초기에는 고려군과 홍전적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서경(평양)이 함락되었다. 이듬해 (공민왕 9년) 이방실 장군은 개경으로 진군하는 적의 선봉 부대를 철화(황주)에서 무찌른 다음 서경(평양)을 총공격하여 적을 대파하였고 적의 잔적들이 압록강을 건너 패주하는 마지막까지 공격하여 격파하여 무장으로서 책임을 완수 하였다.

그 뒤에 홍건적이 배 70척으로 서해도에 침입하자 이를 풍주(豊州)에서 물리쳐 그 공으로 옥대(玉帶)와 옥영(玉纓)을 하사받았다.

공민왕 10년(1361년)에 홍건적 2십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2차 칩입을 시도하였다. 고려 조정에서도 만반의 준비를 하였으나 침공 병력수에 있어 1차 침입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만큼 대규모 침공이었다. 고려 왕조는 이러한 위급한 국난을 타개하기 위하여 이방실 장군을 서북면지휘사로 임명하여 출전케 하였으며 안우 장군을 상원사, 김득배 장군을 부병마사로 임명하여 고려군 2십만 대군을 지휘하게 하였다. 이들이 역사에 길이 남아있는 공민왕조의 그 유명한 홍건족 토벌의 삼원수(三元帥)이다. 1362년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김득배·안우·안우경(安遇慶)·최영(崔瑩)·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개경을 수복하고 적장인 사유·관선생의 목을 자르니 살아남은 잔적은 허겁지겁 도망하여 압록강을 건너 도망가고 말았다.

이후 김용(金鏞)·박춘(朴椿)은 홍건족 토벌의 총병관인 장세훈 원수와 이방실, 안우, 김득배 등 여러 원수의 전공을 시기하여 거짓 왕명을 만들어 정세운 총병관을 죽이고 이방실, 이안우, 김득배 등의 삼원수에게 정세운 총병관을 살해 했다는 죄목을 씌워서 살해하였다.

그럼에도 공민왕은 이를 반성하여 깨닫지 못하고 고려의 멸망을 재촉하는 조짐이 싹트게 했음이 아니었을까?. 국정이 간신들에게 좌우되는 허약성 때문에 임금은 충신과 역신을 구별하지 못하고 국가의 큰 기둥을 잃어 버렸다.

세월이 장구하게 흐르는 동안 이방실 원수에 대한 사적들이 망각되어 오다가 늦게나마 1993년 이방실 추모 사업회를 구성하여 1차 사업으로 공(公)의 출생지인 함안군 여항면 내곡리 국도변에 태역비(胎域碑)를 건립하였으며, 2차 사업으로 1993년부터 1998년까지 사우, 강당, 주차장 등을 완공하여 원수공을 추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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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방실장군 유적

․위치 : 함안군 가야읍 소포리

  조이방실 장군은 고려 충렬와 24년(1298)에 지금의 함안군 여항면 내동에서 태어났으며 고려 공민왕 8년(1359)과 11년(1362) 홍건적의 외침에 의한 존망의 위기를 누차에 걸쳐 구한 맹장으로 후에는 서북면 도지휘사로 제주되었다. 고려 오백년 역사를 지킨 4성군과 16공신 중의 한사람으로서 현재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에 소재한 숭의전에 배향되어 국에서 춘추로 제사를 지낼 만큼 우리민족사에 큰 인물인 것이다. 이러한 이방실 장군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세운 비석이며 인접해 있는 건조물은 함안이씨종중 소유 토지에 1994~1998년(5년)에 걸쳐 정비사업을 실시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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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이방실 장군
홍건적 두차례 격퇴 고려 구한 영웅
[경기일보 2008-6-6]
이방실 장군은 고려 공민왕 8년(1359) 철주에서 4만의 홍건적을 격퇴하여 추성협보공신에 봉해진다. 1361년 홍건적 20만이 삭주 방면으로 침입해 오자 서북면도 지휘사가 되어 방어하였으나 참패하였고 이듬해 정세운, 안우, 최영 등과 함께 홍건적을 물리치고 개경을 수복한다. 중서시랑평장사(정2품)에 올랐으나 친원파인 김용 등의 모함으로 살해된 뒤 연천군 미산면에 소재한 숭의전에 배향되었다.(사진은 묘소 입구에 위치한 이방실 장군의 사당)/조남진기자 njcho@kgib.co.kr


가평군 가평읍은 북한강이 흐르고, 물결을 따라 경기도와 강원도가 자연스럽게 구분되는 곳이다. 오래전부터 이곳을 지나쳐 왔을 북한강은 춘천을 거쳐 가평군을 유유히 흘러 양평군으로 내려간다. 가평군, 경기도 먼 동쪽, 궁벽해 보이지만 강을 따라가면 어느덧 바다에 이를 수 있다. 다만, 지금은 나룻배의 기억이 추억으로 남아 불가능한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끊임없이 흔적을 남기는 인간 덕택에 가평군도 시기마다 각기 다른 역사적 흔적과 문화적 경험을 축적하게 되었다.


산 중턱, 이방실 묘역

가평군 가평읍 하색리, 고려 말기 공민왕대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친 이방실의 묘역이 위치한 곳이다. 묘역으로 올라가는 산기슭에는 근래에 세워진 이방실을 배향한 사당인 충렬사(1986년)와 신도비(1994년)가 있다. 묘역은 사당 왼쪽으로 난 폭 1미터 정도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된다. 계단 왼편으로 3기의 묘가 위치하는데, 위에서부터 차례로 삼대의 묘역이다. 가장 위쪽이 위치하는 것이 함안이씨 시조인 조부 이방실의 묘역이다.
계단 끝에 잘 다듬어 깎인 잔디위로 드러난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묘역을 만난다. 거친 산중턱의 경사에 비해 넓은 공간을 가지고 있다. 각기 시기가 다른 석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봉분에는 병풍석을 둘렀고, 상석과 북석, 향로석, 새로 만든 묘비와 무인석 한쌍과 망주석이 있다. 상석은 1948년에, 묘비는 1978년에 만들어 졌다. 이수와 망주석은 좀더 오래 되어 보인다. 그러나 무인석의 현대적 선은 오래 지켜온 후손의 강직함과는 좀 거리가 있어 보이는 날렵함이 있다. 3기의 묘역 중 조선초로 보이는 손자 묘비가 가장 오래 돼 보인다. 글자를 읽을 수 없어서 안타까웠지만, 풍부한 질감에서 세월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방실 장군은 경상남도 함안군 여항면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그럼에도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가평군에 묘역 조성하게 된 절절한 사연이 궁금해졌다.


고려 무신 이방실의 생애

이방실(1298~1362)은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의 침입에 나라를 구한 유명한 장군이며, 함안이씨(咸安李氏)의 중시조이다. 경상남도 함안군 여항면 내동에서 태어났다.
성장과정은 자세하지 않다. 다만 충목왕(재위 : 1344~1348)이 왕에 즉위하기 전 원나라에 있을 때 안전하게 보필한 공으로 충목왕이 즉위하자 중랑장에 올랐고 호군에 옮겨 전(田) 백결(百結)을 하사하였다. 1354년 공민왕 3년에는 대호군에 올랐으며, 다루가지 노연상이 모반하자 용주의 병사를 이끌고 이를 진압했다.
1~2차 홍건적 침입에 지극한 공이 있었다. 1359년 홍건적(紅巾賊)이 압록강의 얼음판을 건너와 의주를 침략했다. 홍건적은 관원과 부사와 도지휘사 등을 살해하고 정주(靜州), 인주(麟州)를 함락시키고 안주(安州)에 웅거하였다. 이때 이방실은 안주의 만호(萬戶)로 안우, 이음, 이인우 등과 함께 압록강 서경간에서 적을 격파하였다. 그 공으로 이방실 장군은 추성협보공신 추밀원부사(推誠協輔功臣 樞密院副使)로, 안우는 추충절의정란공신 중서평장정사(推忠節義定亂功臣 中書平章政事)로, 김득배는 수충보절정원공신 정당문학(輸忠保節定遠功臣 政堂文學)으로 제수되었다.
이후 홍건적이 전함 70여척을 이끌고 서해도로 재침하자 풍주(豊州)에서 다시금 물리쳤다. 이에 공민왕이 크게 기뻐하여 신하들에게 향연을 내리고 이방실에게 옥대와 옥구슬을 하사하였다. 공민왕은 국가의 보물을 내려 고려 종사가 폐허가 되지 않도록 지켜준 이방실의 공을 치하했다.
2번째 홍건적의 침입은 1361년에 이루어졌다. 적의 무리 20만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삭주와 이성에 침입하자 안우를 상원수로 김득배를 도병마사 이방실을 도지휘사로 삼아 개주, 연주, 박주에서 적을 공격했다. 그러나 밀려 오는 적을 감당하지 못하고 안주 절령에서 참패하여 개경까지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 공민왕은 복주(지금의 안동)에 임시수도를 정하고 피난했다. 공민왕 11년 이방실 장군은 서북면 도지휘사로 제수되어 총병관 정세운, 안우, 김득배, 이여경 등과 함께 20만 대군을 이끌고 동교(東郊)의 천수사 앞에서 진을 치고 개경을 포위하여 적을 섬멸했다.
고려 말 몽골(후일 원)의 침략부터, 왜구, 홍건적의 침입 등 국가적 위기와 혼란 상황에서 홍건적에 대한 승리는 민족적 자존심을 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영웅을 시샘하는 인간부류는 역사상 늘 존재했다. 간신 김용은 평소부터 큰 공을 세운 3원수 안우, 김득배, 이방실 장군의 공을 시기하여 거짓으로 모함하여 이들을 살해하였다. 이 사건을 ‘三元帥殺害事件’이라 한다. 이방실의 아들 중문은 겨우 10살이었지만, 당시 사람들이 아버지 이방실 장군의 공을 기려 극진히 보호해주었다.
이방실은 고려 오백년 역사를 지킨 4성군(四聖君)과 16공신 중의 한 사람으로서, 현재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에 소재하는 숭의전(崇義殿)에 배향(配享)되어 국가에서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고 있다.


고려 말 홍건적의 침입

쇄잔해 가는 고려 사회를 마지막까지 흔들었던 위기는 홍건적의 침입이었다. 원나라 말기에 혼란한 정세를 틈타 하북성의 영평에서 한산동 등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무리로, 머리에 붉은 두건을 둘러서 표상을 삼았으므로 그 이름을 홍건적이라 하였다. 그들은 백련교도를 등에 업고 삽시간에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당시 원나라 말기에 지속적으로 흉년이 들어 굶어 죽는 사람이 길거리에 가득하고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현상이 벌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이민족 몽골의 정복왕조인 원나라 치하에서 차별과 지배를 받아오던 한족 세력은 각 지방에서 봉기와 민란을 일으키는 상황이었다. 한족이 중심이 된 홍건적의 반란세력들은 북적인 원을 몰아내고 중화를 회복하고자 하는 민족주의의 기치를 높이 표방했고, 원의 각지를 침공했다. 이들의 한 무리가 요양까지 진출 원군의 반격을 받고 고려의 영내로 밀려들어오게 되면서 고려는 두 차례에 걸쳐 전란을 치르게 되었다.
1359년 1차 침입은 3천 여명의 홍건적이 압록강의 결빙을 이용해 넘어와 이 일대를 노략하면서 이루어졌다. 당시는 왜구의 침해는 해를 이어 격심해 지고 있었는데, 홍건적까지 침입함에 고려의 국세는 날로 위태로워 졌다. 고려군은 홍건적에 밀려 의주 철주, 정주, 인주로 퇴각하면서 서경(평양)까지 위기에 빠졌다. 주변 사민을 모집해 군사를 보충하였으나, 우세한 홍건적은 결국 서경을 함락시켰다. 모군으로 대항하고자 하였으나, 적이 이를 미리 알고 잡은 포로 1만여명을 살해하여 시체가 산더미 같았다고 한다. 홍건적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아군이 분발하여 서경을 되찾고 적을 몰아내는 전공을 거뒀다. 여세를 몰아 대전승을 올리고 이방실, 안우, 김득배의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기습적으로 적을 몰아냈다. 적은 압록강이 깨져 익사한 자가 수천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방실 등은 새벽에 군사를 배불리 먹여 전세를 재정비하고 여세를 몰아서 다시 추격하여 수백명을 베었다. 이후에도 홍건적은 요동의 길을 막고 원과의 접촉을 방해했으며, 지속적으로 침입 해왔다.
홍건적의 2차 침입은 1361년에 이루어졌다. 1차 침입시 공을 세운 이방실 등에게 중책을 맡겨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이방실에게는 서북면을 지키는 중책을 맡기고, 이여경은 개경에 이르는 길목을 지키게 하였다. 안우 등이 개주, 박주 등지에서 적과 싸워 연승을 거두었으나, 이러한 항전에도 불구하고 홍건적은 철기 5천명으로 개경의 주요방어선인 절령책을 돌파하고 개경을 점령했다. 결국 공민왕은 개경을 버리고 복주를 임시 수도로 정하고 천도하게 된다.
1차, 2차 홍건적의 침입을 막아내긴 하였지만,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겨울에 홍건적이 쳐들어 왔을 때는 혹한으로 사졸들의 손발이 얼어터지고 쓰러지는 자가 많았다. 뿐만 아니라 지나는 고을마다 굶주리고 피곤하여 죽은 자가 길에 가득했다고 한다. 또한 홍건적은 잔학한 행위로 막대한 해를 입혔다. 남녀를 불문하고 태워 죽이기도 하고, 임신한 부녀자의 젖을 구워먹는 등 잔학한 짓을 자행했다. 전후 조정에서는 무장지위의 향상이 현격해지는 가운데 평장사 김용이 간교한 꾀를 내어 정세운 및 안우, 이방실, 김득배 살해, 삼원수 살해사건 발생하기도 했다.


가평과의 인연

고려 말기는 고려왕조의 기반이 되는 경기지방이 홍건적에 의해 유린되고, 호적 망실되어 국가의 지배력이 악화되었다. 또한 노비로 전락하여 농장에 투탁하는 양인이 늘었으며, 사회적 혼란과 급격한 변화가 노정이 되었던 시점이다. 공민왕의 개혁정책이 실패하고, 더 이상의 기대가 없어지면서, 새로운 사회를 꿈꾸기 시작한다.
문득 이방실과 가평군의 인연을 다시 생각해 본다. 고고학을 하는 분이 말씀하시길 인간은 자신이 살았던 터전에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고 하셨다. 그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시간과 공간을 땅에 새긴다고 했다. 이방실 장군도 가평에 남긴 다양한 사람들의 흔적 하나이다. 그 시간을 하나씩 꺼내면 역사와 문화가 만들어진다.
고려말 개경을 지켰던 이방실, 그리고 숭의전이 하나의 고리이다. 새로이 개창한 조선은 전 왕조와 이에 충성을 다한 충신을 배양하여 그들의 절의를 높이 숭앙했다. 이방실 장군과 가평군의 관계는 멀어 보이지만, 장군의 뜻을 높이 기리던 마음이 모여 이곳에 묘역을 조성하고, 후손들이 끊임없이 관리하게 된 것이다. 함안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 가평에서 고려시대 나라를 구하고자 한 용장을 만났다.
역사는 참 묘하다. 홍건적은 원나라 말기의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일어난 반란 세력이었지만, 고려에게는 외적의 잔학한 침입으로 다가왔으며 그들의 잔학함은 무서운 외적과 다를 바 없었을 뿐이다. 또한 조선사회에서는 고려 충신은 새시대를 지향하던 자신들에게는 적대적 지위를 가짐에도 불구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들의 절의만큼 변하지 않는 의리를 원했으니 말이다.
/류현희 경기문화연구소 연구원
담당기자 : 류현희 경기문화연구소 연구원/사진=조남진기자  (njcho@kg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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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운 | 2009/05/20 01:04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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