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의 개혁정치 & 정세운( 鄭世雲 ), 안우( 安祐 ), 이방실( 李芳實 ) 누가 죽였나?

정세운( 鄭世雲 ), 안우( 安祐 ), 이방실( 李芳實 ) 은 누가 죽였나?
일반적으로 공민왕( 고려시호로는 경효대왕(敬孝大王))은 고려 말기에 개혁을 단행했던 개혁군주이자 부인인 원의 노국대장공주와의 애틋한 사랑의 주인공으로서, 또는 그림과 글씨에 능한 예술가로서 자주 거론되기도 하며 이를 상징하는 좋은 사례 중의 하나가 바로 공민왕의 눈물이다. 그러나 공민왕의 이러한 개혁군주적이고 감성적인 면모 뒤에는 뛰어난 정치가. 더 나아가 심지어 냉혹한 정략가의 모습이 존재하고 있으며 역사적으로도 공민왕의 행적에서는 오히려 그러한 정치 정략가적 면모가 적잖게 존재하고 있다.

1330년 충숙왕의 차남으로 태어난 공민왕은 1341년 원에서 들어가 11년 동안 숙위하는 인질 생활을 하면서 충목왕, 충정왕에게 두 번이나 왕위계승의 기회를 놓치고 수종자들 다수가 떠나는 등의 간난신고 끝에 드디어 1352년 즉위하게 된다. 공민왕은 즉위하여 당시 폐위되어 강화로 퇴거하고 있던 충정왕을 독살해버렸는가 하면 즉위교서에서 왕 자신의 친정을 강조하고 고려의 자주성을 내세우며 왕권강화와 개혁정치의 의지를 선포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공민왕의 정치개혁는 기철( 奇轍 )을 중심으로 한 부원세력과 마찰을 빚게 되었으며 이에 편승하여 공민왕의 측근세력이었던 조일신( 趙日新 )의 임진정변( 1352 )이 일어났다가 오히려 공민왕의 왕권강화와 개혁정치에 타격을 입히고 말았다.( 사서에서는 임진정변을 조일신 단독으로 일으킨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또 그것이 정설이나 정변의 명분이 기씨 및 부원배 제거였음을 본다면 공민왕이 정변을 배후에서 조장하였을 가능성조차 있었으며 실제로 이후 공민왕은 조일신을 지지하며 형세를 관망하였다가 원의 존재를 우려했던 이인복(李仁復)의 조언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조일신을 전격 제거하였던 것이다. )

조일신의 난 실패로 인하여 정국은 다시 부원세력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간 공민왕은 안으로는 황후 기씨의 탄생일이라던가 여러번 기씨의 모친 이씨( 李氏 )를 찾아가 인사 및 연회를 베풀었으며 밖으로는 원이 민중반란으로 인하여 군대를 요청하자 고려종정군( 高麗從征軍 )을 파병( 1354 )하여 강남반란군을 토벌하기까지 하는 등 자중하며 이에 대처하였다. 그러다가 고려종정군으로 인하여 원의 내란과 쇠망의 소식을 들은 공민왕은 병신정변( 1356 )으로 기철 일파를 전격적으로 숙청( 사서에서는 기철의 역모로써 공민왕측이 선수를 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보다는 반대로 공민왕측이 치밀한 음모로써 단행하였을 가능성이 더 농후하다. )하고 원나라의 간섭기구 정동행성 이문소( 理問所 )를 철폐하는 한편, 군대를 일으켜 압록강 너머를 공격하고 쌍성총관부를 수복하였다. 그 과정에서 원이 80만 대군의 협박으로써 고려 침공의 의지를 드러내자 공민왕은 요동공격의 장수 인당( 印王+當 )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그를 참수하여 원에 사과하는 등 반원정책을 후퇴시키는 저자세를 보였으며 아울러 원이 이를 청납하자 이문소 등 정동행성 관청들의 혁파와 쌍성총관부 수복을 기정사실화하고 실리를 획득하였다. 이렇게 하여 공민왕은 장수 하나의 희생으로써 반원개혁을 성사시켰던 셈이다. 이밖에도 공민왕은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수 있었던 유력 왕족들에 대한 대비를 소홀히 하지 않았는데 앞에서 서술했던 충정왕 독살과 더불어 이미 충정왕 폐위 두달 이후 고려로 귀환하기 전에 역시 또다른 조카인 충혜왕의 서자 석기( 釋奇 )를 삭발시켜 중으로 만들었으며 반원개혁 이후 석기를 둘러싸고 역모가 일어나자 제주도에 유배보내던 중에 바다에 처넣기까지 하였고( 그러나 석기는 생존하여 공민왕 12년 그를 죽였다는 소동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생존해 있다가 마침내 우왕 때 처형된다. ) 충정왕 폐위 후에 원나라로 도주하였던 덕흥군을 처단할 목적으로 집요하게 송환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공민왕은 내외로 개혁정치를 단행함과 동시에 왕권강화를 추구하였지만 공민왕의 이러한 반원개혁정치는 역설적으로 반원봉기군이었던 홍건적의 침입에 의하여 흔들리게 되었다. 홍건적의 1차( 1359~1360 ), 2차( 1361~1362 ) 침공으로 반원정책에서 친원정책으로 전환하여 정동행성이 다시 설치되었으며 외침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정세운( 鄭世雲 ), 안우( 安祐 ), 이방실( 李芳實 ) 등 공민왕의 측근세력인 유력한 무장들이 세력이 커지게 되자 공민왕은 또다른 총신 김용( 金鏞 )으로 하여금 정세운, 안우, 이방실, 김득배( 金得培 ) 등을 모살해버리는 조치를 취한다.( 사서에서는 사원수 제거의 책임을 오로지 김용에게만 돌리고 있으나 이는 단순한 김용의 음모뿐만 아니라 홍건적 격파로 인해 절정에 달하였던 유력 무장들의 득세와 왕권위협에 대한 공민왕의 대처라고 할 수 있는바 조선시대의 사가들 또한 이를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 그러나 이러한 공민왕의 왕권강화노력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때문에 ) 공민왕의 측근세력들은 상술했던 조일신, 김용과 사원수, 홍언박( 洪彦博 ) 등의 관계와 같이 서로 대립 상쟁을 거듭한 끝에 와해되어 갔으며 마침내는 흥왕사의 변( 1363 )으로 인한 홍언박과 김용의 사망으로 공민왕의 측근세력은 사실상 붕괴하고 말았다.


게다가 공민왕은 기황후측을 위시한 원 및 최유( 崔濡 ) 등 부원세력의 공민왕 폐위사건에도 전력을 쏟아 대응해야 했으며, 특히 당시 권위와 권력의 원천이었었던 원나라에서 공민왕 대신 옹립한 대립국왕 덕흥군의 침입( 1364 )은 짧은 기한이었지만 공민왕에게 만만치 않은 부담을 안겨주었고 계속된 전란으로 인하여 최영( 崔瑩 ) 등 무장세력이 다시 대두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노국공주가 난산으로 인하여 사망( 1365 )하게 되었으니 노국공주는 공민왕이 즉위하기 이전에 원에서부터 같이 있었고 또 즉위 이후 왕의 지지자로써 고락을 함께 해왔던만큼 공민왕은 심대한 정신적 타격을 입었다.( 사서에서는 이때를 시발점으로 하여 공민왕의 눈물 기록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 그러한 고난 속에서도 공민왕은 덕흥군 침공 이후 외부침입의 감소로 인한 내부안정에 힘입어 이전부터 알고 지냈던 무명의 승려 신돈( 辛旽 )을 파격 등용하는 것으로써 다시 개혁의 노력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공민왕은 중반기때인 1358년부터 신돈과 대면하여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 공민왕은 신돈에게 대폭 권력을 위임하여 최영 등의 무장세력 및 권문세족을 제거하였으며 신돈의 개혁은 변정( 辨正 )사업 내지는 성균관 증건 등의 여러 정치, 경제적 개혁으로써 민생안정과 왕권강화, 더 나아가 근세 조선의 주축이 될 신진사대부 성장의 계기가 되었다. 그 성과를 바탕으로 공민왕은 1차( 1369 ), 2차( 1370 ), 그리고 신돈사후 3차( 1371 )로 이어졌던 동녕부정벌이나 일본해적의 감소와도 같은 대외적 성과 및 자주적 관제개혁과도 같은 대내적 성과를 이룩할 수가 있었다.

이와 같이 공민왕은 신돈을 앞세우고 개혁을 강력하게 진행해 나갔으나 점점 심해지는 무장세력, 권문세족, 심지어 사대부세력들의 신돈 및 개혁에 관한 반발이 심화되었으며 신돈이 타락하고 그 스스로 공민왕의 전위 이상을 넘어서서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두각되어 왕권에 위협이 되자 공민왕은 신돈의 등용처럼 역시 전격적인 조치로써 신돈을 숙청 유배하여 4,5일 만에 처형( 1371 )시켜 버리고 만다.( 사서에서는 신돈의 파멸이 그의 역모로 인하여 벌어진 것처럼 기술하고 있으나 이미 공민왕이 그 이전부터 신돈을 견제해 나가고 있었으며 1370년 친정을 선포함으로써 사실상 신돈의 정치적 생명을 끊어놓은 것을 볼 때 신돈의 몰락은 시간문제였음을 알 수 있다. ) 이리하여 신돈의 실각으로 권문세족과 무장세력이 재차 정계에 진출하였고 공민왕의 개혁정치와 왕권강화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으며 이때부터 왕은 급속한 정신적 파행을 겪게 되었던바 사서에서 더욱 많아졌던 공민왕의 눈물 기록들과 함께 나타나는 왕의 난행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열악해진 정치적, 신체적 환경에서도 왕권을 강화하려는 공민왕의 노력은 계속되었으니 공민왕은 1374년 피살될 때까지 환관, 폐행들로 하여금 정방( 政房 )을 장악하게 하였는가 하면 국왕의 신변호위과 지도자 양성을 목적한 자제위( 子弟衛 )를 설치( 흔히 공민왕의 자제위에서의 변태행각이 유명하고 또 공민왕이 그로 인하여 결국은 최후를 맞게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자제위의 부산물일 뿐이다. )하여 권력의 중심을 자신에게 끌어들이고 다시 정국의 반전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공민왕의 시대는 가히 5, 6년에 한번 꼴로 개혁을 시행하였을만큼 개혁정치의 시대였다. 이러한 개혁정치는 원명교체기의 외부적 상황과 더불어 고려왕조의 내부적 개혁동향, 그리고 바로 이를 수렴할 수 있었던 개혁군주 공민왕 덕택으로 전개될 수가 있었다. 공민왕은 개혁이 실패하고 그 자신이 비록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긴 하였지만 백성들의 여망에 힘입어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를 쟁취하였으며 숱한 내란과 외침을 극복해나가면서도 23년의 재위기간이나 군림할 수 있었고 그의 재위시대는 국왕과 재상과 관료들의 권력균형이 가장 안정을 이루었던 시기, 미래 근세 조선의 개혁의 이정표가 되었던 시기로써 평가되었다. 그러한 공민왕 시대를 지탱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공민왕 자신의 정치적 지도력, 더 나아가 왕권강화와 개혁정치를 위한 그의 비정하고도 처절하기까지 했던 정략( 비록 상당히 편향적이긴 하지만 조선왕조의 사가들의 ' 왕은 성품이 시기하고 잔인하여, 심복(心腹) 대신(大臣)일지라도 권세가 강성하면 반드시 꺼려 목베었다. '의 평가기록이 잘 보여준다 하겠다. )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장에서는 공민왕의 왕권강화를 중심으로 공민왕의 재위기간을 살펴보았다. 물론 이외에도 간간히 나타났던 공민왕의 감성적인 면모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공민왕의 또다른 면모를 통하여 원명교체기를 배경으로 내우외환으로 무너져가는 고려를 되살리고자 노력했던 군주이자 한 인간이었던 공민왕의 진면목에 대하여 더욱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by 백운 | 2009/05/19 23:58 | 여행관련자료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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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伯顔帖木兒 at 2010/02/10 08:48
정말 공민왕이 조일신의 난과 김용의 정세운 살해에 개입했다면 그는 정말 마키아벨리스트겠군요.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Commented by ☆bluestar☆ at 2010/12/13 21:27
학교 수행평가인데 잘보고갑니다 ㄳ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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