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석(碑石), 비문(碑文) 소견

비석(碑石), 비문(碑文) 소견
                          김영진(가락중앙종친회 전부회장)

최근 선영에 각종 선물을 시설하는 분들이 늘면서 이에 대한 문의가 자주 있다. 그 요지는 비석의 크기와 모양, 그리고 비문의 문체에 관한 것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에 본인의 소견을 피력하여 관심있는 종원들의 참고에 임하고자 한다.

첫째로 비석의 모양과 크기에 관한 것이다. 모양은 비와 갈의 차이가 있는데 당대에는 5품 이상의 관직에 있던 분은 비를 세우고 5품 이하의 관직에 있던 분은 갈을 세우도록 규제되어 있었다.
비는 거북이 형상의 대석에 뿔이 없는 용의 형상을 새긴 것을 씌운 귀부리수의 것을 말하고 갈은 모난 대석에 둥근 갓을 씌운 방부원수의 것이라 하였다. 후산서의 주를 보면 갓의 모양이 네모진 것이 비, 둥근 것이 갈이라 하며 갓의 모양으로 비와 갈을 구분하고 있다.
또, 비석의 크기에 대하여 원대의 국자조교였던 진역증은 비는 웅혼장하고 갈의 크기는 질실전아하다고 하였다. 이상을 요약하면 갓의 형태가 둥글고 품계가 5품이하이며 돌의 크기가 질실한 것이 묘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웅혼과 질실의 차이가 무엇인가 계량적 구분이 명확하지 않을 뿐 아니라 후대에 와서는 비와 갈의 구분이 더욱 명확하지 않게 되었다. 비록 품계는 없어도 위대한 학자라면 비를 세운 예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경국대전이나 이를 증보한 대전회통에도 관련 규정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 현대에 와서는 형편에 따라 돌의 크기, 모양 등을 자의적으로 조성하는게 보통이다. 결국 현대에 와서 비와 갈은 동일한 것으로 봄이 마땅하다.

둘째로 문체에 관한 것이다. 초기의 비문은 서사체 위주로 작성되었고 갈명은 운문체에 서사체를 혼용하였다 .운문은 사업이 주축을 이루었으나 오언, 칠언의 장단구로 된 것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갈명의 기원은 최충이 지은 홍경사갈에서 찾을 수 있으나 가장 두드러지게 갈명을 지은이는 송시열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문체는 어디까지나 한자를 상용하던 시대의 문체이지 한자를 모르는 세대의 문체로는 그 의미가 없다.

셋째로 비갈에 쓰이는 문자에 관한 것이다. 최근까지도 한자를 즐겨쓰는 이가 있으나 비갈이 선대의 방명과 행적을 후세에 전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한글을 위주로 작성하고 한자는 필요불가결한 곳에만 한정하는게 마땅하다. 현대인도 읽을 수 없는 문자라면 어떻게 비갈이 그 사명을 후세에 다할 수 있겠는가?
넷째로 비문의 서술방식이다. 비석의 전면에는 직명이나 학위에 이어 성명르 기록하고 뒷면에는 죽은 이의 ①아호 ②선계 ③부모의 성명과 몇남 ④학력⑤ 경력 등을 약술하고 이어서 ⑥죽은 이의 생전 공적이나 공덕을 사실대로 기록하고 ⑦끝으로 자손들에 대하여 언급한다. 이 때 조심할 것은 죽은 이를 현창코자 사실이상의 공덕이나 공적을 부풀리는 것은 고인에 대해서도 결례가 된다. 다만 사실대로 쓴다고 하여 고인의 부정적 측면을 기록한다는 것도 고인에 대해 괴로움을 주는 것이므로 삼가해야 한다.

다섯째로 신도비에 관한 것이다. 신도비와 묘비를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신도비는 묘비와 달리 묘지 입구의 큰길 동남쪽에 세우는 것이 보통이다. 동남쪽이 신이 다니는 도 이기 때문이다. 동남쪽이 산천으로 막혀있다면 지리적 위치를 감안해 적의 조절할 수 있다. 조광조의 신도비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신도비는 묘비보다 규모가 웅장하고 비문의 내용을 더욱 구체화하여 서술체로 작성한다.

이상 비석과 비문에 대해 종말의 현대적 소견을 간단히 피력하였으나 여러 종원들의 질점이 있으면 감사하겠다.
-가락회보 제310호에서-

by 백운 | 2009/03/11 23:16 | 태그 스크랩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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