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가는 길 - 중국 집안 마선구고분군 전미천왕릉(西大墓)


고구려 가는 길 - 중국 집안 마선구고분군 전미천왕릉(西大墓)


    


   1만 1,300기(基)에 이르는 통구고분군은 다시 6개의 소고분군으로 나누어지는데, 마선구고분군은 이 6개고분군 가운데의 하나이며, 칠성산고분(七星山古墳)의 주위와 칠성산 서쪽기슭에서 마선구하(麻線溝河)에 이르는 지역 및 마선구하의 양안에 걸쳐 산재한 대소고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산고분군(禹山古墳群)과 함께 통구고분군의 2대고분군으로 불리며, 총 2,593기의 고분이 있다. 이 가운데 적석묘를 비롯한 석분류(石墳類)는 1,376기이며, 토분류(土墳類)가 1,163기이다. 단일유형으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토석(土石)을 혼합하여 봉분을 입힌 봉토석실묘(封土石室墓)로 모두 1,018기에 달하며, 적석묘도 419기에 이른다. 널리 알려진 천추묘(千秋墓)·서대묘(西大墓)와 벽화고분으로 잘 알려진 마선구1호분이 이 고분군 내에 있다.


 



▲전미천왕릉


 



▲전미천왕릉


 


   서대묘는 통구 마선구고분군의 적석묘 가운데 하나로 한 가운데가 깊숙이 파헤쳐져서, 그 안에 돌들이 남쪽으로 약 20 m 정도 쏟아져 나와 있다. 만약 훼손되지 않았다면 무덤의 높이는 더 높았을 것이다. 한눈에 보기에도 도굴범의 소행이 아니라, 군대 등을 동원한 대규모 도굴임을 알 수 있다. 전문가들은 이 무덤을 342년 모용 선비족에 의해 시신이 파헤쳐진 고구려 제15대 미천왕릉으로 보고 있다.


 


○三十二年, 春二月, 王薨, 葬於<美川>之原, 號曰<美川王>.


32년 봄 2월, 왕이 별세하였다. 미천 언덕에 장례를 지내고, 호를 미천왕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미천왕>


 


   미천왕(美川王, ?~331년, 재위 : 300년~331년)은 고구려의 제15대 군주이다. 293년 아버지인 고추가 돌고(古鄒加 ?固)가 백부인 봉상왕에게 반역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자 을불은 도망쳐 신분을 숨기고 고용살이와 소금장수 등을 전전하였다. 300년 국상 창조리(倉助利)가 봉상왕을 폐위할 마음을 품고 을불을 찾아 모셨으며 이후 봉상왕을 폐위한 뒤 왕으로 옹립되었다.


 


미천왕[호양왕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을불[혹은 우불이라고도 한다.]이고, 서천왕의 아들 고추가 돌고의 아들이다. 예전에 봉상왕은 그의 아우 돌고가 모반할 생각을 가졌다고 의심하여 그를 죽였다. 그의 아들 을불은 자기에게도 해가 미칠 것을 두려워 하여 도망했었다. 처음에는 수실촌 사람 음모의 집에서 머슴 생활을 하였다. 음모는 을불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지 못하고 힘든 일을 시켰다. 그 집 옆의 연못에서 개구리가 울면, 음모는 개구리 소리가 나지 않도록 을불로 하여금 밤마다 기와 조각과 돌을 던지게 하였고, 낮이면 나무를 해오라고 독촉하여, 잠시도 쉬지 못하게 했다. 을불은 고생을 이기지 못하고 일년만에 그 집을 떠났다. 을불은 동촌 사람 재모와 함께 소금 장사를 하였다. 배를 타고 압록에 가서 소금을 가지고 내려와 강의 동쪽 사수촌 사람의 집에 머물었다.


 



▲전미천왕릉


 



▲전미천왕릉


 


그 집 노파가 소금을 요구하여, 한 말 가량 주었다. 그러나 그 노파는 그 이상 주기를 요청하였다. 을불은 주지 않았다. 그러자 노파가 그를 미워하여 몰래 자기의 신발을 소금 속에 묻었다. 을불은 이를 모르고 소금을 지고 길을 떠났다. 노파가 쫓아와 신발을 찾아들고, 을불이 자기의 신발을 감추었다고 거짓으로 압록 성주에게 고발하였다. 성주는 신발 값으로 소금을 빼앗아 노파에게 주고, 을불에게 매를 때린 후 석방하였다. 이리하여 을불은 얼굴이 여위고 의복이 남루하여, 누구든 그가 왕손임을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다. 이 때 국상 창조리가 장차 왕을 폐하고자 하여, 먼저 북부 조불과 동부 소우 등을 파견하여, 온 나라에서 을불을 찾게 하였다. 그들이 비류하 물가에 도착하였을 때, 한 사나이가 배에 있었는데 얼굴은 비록 초췌하였으나, 행동 거지가 보통 사람과는 달랐다. 소우 등은 이 사람이 을불이 아닌가 생각하고, 그 앞에 나아가 절을 하고 말했다.


 


“지금 국왕이 무도하므로 국상이 군신들과 함께 왕을 폐하려고 합니다. 왕손께서는 행동이 검소하고 인자하며 사람을 사랑하므로, 조상의 유업을 이을 수 있다 하여, 저희들을 보내 맞아 오게 하였습니다.”


을불이 의심하여 말했다.


“나는 평민이오 왕손이 아닙니다. 달리 알아 보시오.”


소우 등이 말했다.


“지금 왕이 인심을 잃은지 오래여서, 실로 나라의 주인이 되기에 부족합니다. 이로 인하여 여러 신하들이 왕손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청컨대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전미천왕릉


 



▲전미천왕릉 동남 모서리의 방단 흔적


 


그들은 곧 을불을 받들어 돌아왔다. 조리가 기뻐하며 을불을 조맥 남쪽 인가에 머물게 하고,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하였다. 가을 9월에 왕이 후산 북쪽에서 사냥할 때 국상 조리가 따라갔다. 조리가 여러 사람들에게 말했다.


“나와 마음이 같은 자는 내가 하는 대로 하라.”


그는 곧 갈대잎을 모자에 꽂았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그를 따라 갈대잎을 꽂았다. 조리는 여러 사람의 마음이 모두 같다는 것을 알고, 드디어 그들과 함께 왕을 폐하여 별실에 가두고, 군사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곧 왕손을 맞아 옥새를 올려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미천왕>


 


   미천왕릉은 고국원왕 12년(342년)에 고구려로 쳐들어온 전연(前燕)의 모용황(慕容?) 군대에 의해 도굴당한다. 왕후 주씨(王后 周氏)는 미천왕의 시신과 함께 포로로 끌려가 355년까지 인질로 고초를 겪었다. 고국원왕은 343년에 많은 공물을 바치고 시신을 돌려받았다. 


 


12년 겨울 10월, 연 나라 임금 황이 용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입위 장군 한이 황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하였다. ‘먼저 고구려를 빼앗고, 다음에 우문씨를 멸해야만 중원을 도모할 수 있다.’ 고구려에는 두 길이 있었다. 북쪽 길은 평탄하고 넓으며, 남쪽 길은 험하고 좁다. 따라서 사람들은 항상 북쪽 길을 선택하였다. 한이 말했다. “적국은 일반적으로 상황을 고려하여, 우리 대군이 반드시 북쪽 길로 오리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따라서 북쪽 길을 중시하고 남쪽 길을 가볍게 취급할 것입니다. 왕께서 응당 정예 부대를 이끌고 남쪽 길로 가서 불의의 공격을 하면, 북쪽 도성은 공격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또한 별도로 소부대를 북쪽 길로 보내면 다소 차질이 있더라도, 그들의 심장부가 이미 무너졌으므로, 사지를 움직일 수 없을 것입니다.” 황은 이 말을 따랐다.


 



▲전미천왕릉


 



▲전미천왕릉


 


11월, 연 나라 임금 황이 직접 강병 4만을 거느리고 남쪽 길로 진군하였다. 모용 한과 모용 패를 선봉으로 삼고, 별도로 장사 왕 우 등으로 하여금 군사 1만 5천을 거느리고 북쪽 길로 진군하게 하여, 우리 나라를 침범하였다. 왕은 아우 무로 하여금 정예 부대 5만을 이끌고 북쪽 길을 방어하게 하고, 자신은 약한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 길을 방어하였다. 이 때 모용 한 등이 먼저 와서 전투를 벌였고, 연이어 황의 대군이 도착하였으므로, 우리 군사가 대패하였다. 좌장사 한 수가 우리 장수 아불화도가를 죽이자, 모든 적들이 승기를 타고 드디어 환도성으로 쳐들어왔다. 왕은 단기로 단웅곡으로 도주하였다. 연 나라 장군 모여니가 따라와서 왕모 주씨와 왕비를 잡아 돌아갔다. 이 때 연 나라 장군 왕 우 등은 북쪽 길에서 우리 군사와 싸우다가 모두 전사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황은 더 이상 추격하지 않고 사람을 보내 왕을 불렀다. 왕은 가지 않았다. 황이 돌아가려 할 때 한 수가 말했다.


 


“고구려 땅은 우리가 남아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지금은 그들의 임금이 도주하고 백성들이 흩어져 산골짜기에 잠복하였으나, 우리 대군이 철수한 뒤에는, 틀림없이 다시 모여 나머지 군사를 수습할 것입니다. 이는 족히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구려 왕의 아버지의 시체를 싣고, 그의 생모를 사로잡아 돌아갔다가, 고구려 왕이 제 발로 와서 사죄하기를 기다린 후에 돌려주어, 은혜와 신의로써 무마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황이 그 말에 따라 미천왕의 무덤을 파서 그 시체를 싣고, 대궐 창고에 있는 역대 보물을 탈취하고, 남녀 5만여 명을 사로잡고, 궁실을 불태우고, 환도성을 헐어 버리고 돌아갔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전미천왕릉


 



▲전미천왕릉


 


○十三年, 春二月, 王遣其弟, 稱臣入朝於<燕>, 貢珍異以千數. <燕>王<?>乃還其父尸, 猶留其母爲質.


13년 봄 2월, 왕이 아우를 연 나라에 보내 자신을 신하로 칭하면서 예방케 하고, 1천 건에 달하는 진기한 물건을 바쳤다. 연 나라 임금 황이 곧 왕의 아버지의 시체를 돌려 보내고, 왕모는 그대로 남아 있게 하여 볼모로 삼았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二十五年, 冬十二月, 王遣使詣<燕>, 納質修貢, 以請其母. <燕>王<雋>許之, 遣殿中將軍<刀龕{?龕}> , 送王母<周>氏歸國. 以王爲征東大將軍<營州>刺使, 封<樂浪>公, 王如故.


25년 겨울 12월, 왕이 연 나라에 사신을 보내 볼모와 공물을 바치고, 왕모를 돌려 보내기를 요청하였다. 연 나라 임금 준이 이를 허락하고, 전중 장군 도 감으로 하여금 왕모 주씨를 호송하여 귀국하게 하였다. 왕에게 정동대장군영주자사의 작호를 주고, 낙랑공으로 봉하였으니, 이전과 동일하게 되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전미천왕릉에는 아직도 가왓장이 널려있다.


 


 


 


<2011. 8. 2>


 


by 백운 | 2015/07/11 07:10 | 여행관련자료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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