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가는 길 - 중국 집안 마선구고분군 전고국양왕릉(千秋墓)


고구려 가는 길 - 중국 집안 마선구고분군 전고국양왕릉(千秋墓)


  


   마선구무덤떼에 들어 있는 천추묘는압록강의 지류인 마선하 동쪽 200m 지점에 압록강으로 부터 700m 북쪽에 있다. 이 무덤은 밑면이 85x80mfh 알려져 있었지만 새 자료에는 60x60m로 나타나 있다. 현재 남아있는 높이 약 15m, 넓이 약 2057평으로 장군무덤보다 7배, 태왕릉보다 0.56배 더크다. 일제시대인 1936년에 무덤 속에서 많은 기와와 벽돌이 발견되었는데, '千秋万世永固(천년만년 길이 견고하여라)', '保固乾坤相畢(하늘 땅이 다할 때 까지 견고함을 유지하여라)'등의 명문벽돌이 출토되어 천추묘(千秋墓)라고도 부른다. 중국에서는 고국양왕의 능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고국양왕이 고국양(故國壤)에 장사지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전고국양왕릉


 



▲전고국양왕릉


 


○九{八} 夏五月, 王薨. 葬於<故國壤>, 號爲<故國壤王>.


9년 여름 5월, 왕이 별세하였다. 고국양에 장례를 지내고, 호를 고국양왕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고국양왕>


 


   고국양왕(故國壤王, ? ~ 392년?, 재위 : 384년 ~ 392년?)은 고구려의 제18대 군주이다. 이름은 이련(伊連) 또는 어지지(於只支)로 고국원왕의 둘째 아들이다. 국양왕(國壤王)이라고도 한다. 광개토태왕의 아버지로 고구려의 요동진출을 적극적으로 꾀한 왕이다.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392년에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고 실성(實聖)을 인질로 받기도 하였다.


 


○九{八} 年春, 遣使<新羅>修好, <新羅>王遣姪<實聖>爲質.

9년 봄, 신라에 사신을 보내 우호를 약속하였다. 신라왕(내물왕)이 자기의 조카 실성을 볼모로 보내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고국양왕>


 



▲전고국양왕릉


 



▲전고국양왕릉


 


   고국양왕릉은 심하게 파괴되어 계단의돌덩이들이 나뒹굴고 돌무더기는 무너져 마치 돌무지 산을 보는 듯하다. 귀퉁이에는 아직도 기단석이 남아 있는데 동남쪽면이 가장 잘 남아있다고 한다. 또한 서남쪽에는 하나의 거대한 바윗덩이가 무덤에 기대어 있는데 능의 규모로 보아 건축 당시에는 20여개 정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주위 40m를 보호지역으로 정하여 출입을 막고 있어 확인할 길이 없었다.


 


   집안지역의 고구려 무덤 중 가장 큰 규모로 알려진 천추묘(千秋墓)는 마선고분군 초입에 있다. 천추묘의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흐른다. 이 무덤에서 “천추만세영고(千秋万歲永固, 천년만년 길이 견고하여라)”, “보고건곤상필(保固乾坤相畢,하늘 땅이 다할 때 까지 견고함을 유지하여라)”라는 글이 새겨진 벽돌이 발견돼 ‘천추묘’라 불린다. 중국의 학자들은 천추묘를 광개토태왕의 아버지 고국양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구려 왕의 시호를 보면 고국천, 고국원, 고국양 등의 이름이 있는데 여기서 고국은 마선 지역을 일컫는다. 따라서 학자들은 지명과 릉의 규모와 형태, 위치, 등을 종합해 고국양왕의 무덤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천추묘의 크기는 가로, 세로 85여미터의 길이에, 현재 남아 있는 높이만 15미터에 이르러 고구려 고분들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전고국양왕릉


 



▲천추묘 표석


 


   천추묘는 광개토태왕릉이나 장수왕릉과 마찬가지로 계단식 적석묘이나 지금은 무너져 겨우 형체만 유지하고 있다. 멀리서 보면 거대한 돌더미에 지나지 않지만 가까이서 보니군데 군데 계단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특히 남서쪽 모서리 부분은 그 형체가 비교적 잘 보전돼 있다. 남서쪽 모서리 부분 돌들은 쌓은 양식이나 거대 자연석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광개토태왕릉과 흡사하다. 이는 천추묘의 주인이 광개토태왕과 가까운 시기의 왕이라는 추측이 가능하게 해 준다. 이런 점들이 무덤의 주인이 광개토태왕의 아버지 고국양왕일 것이라는 추측에 신빙성을 더해준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천추묘 주위에 인가들이 빼곡히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한다. 그 인가들은 대부분 천추묘에서 나온 돌로 지어졌다고 전해진다. 당국이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을 하면서 인가들을 걷어내자 잊혀졌던 유적인 제단이 무덤 동쪽에서 발견됐다. 또 천추묘에서는 수많은 기와조각들과 수막새가 발견되기도 해 무덤 정상부에 제사를 지내던 향당(享堂)이 있었음을 확인시켜주기도 했다. 이는 고구려인들이 사후 세계를 중시여기고 조상들을 모시는 일에 소홀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전고국양왕릉


 



▲전고국양왕릉


 


   천추묘에서는  ‘손끝무늬’ 기와가 발견 되기도 하였다.  손끝무니 기와란기와를 만든 도공이 다섯 손가락의 끝 자국을 기와 한쪽 가장자리에 찍어 넣은 것이다. 손끝무늬 기와는 지금까지 발해 유적에서만 발견되어 왔다. 고구려 고분에서 이 기와가 발견된 것은 발해가 고구려 고분을 관리하는 등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중국은 고구려는 물론 발해 역시 중국사의 일부로 취급하고 있기 때문에,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 단편적인 증거만으로는 중국의 동북아 공정을 막기 부족한 면이 있다.


 


   다만 발해 시대 만들어진 기와 조각들이 추가로 이 고구려 왕릉에서 발견됨에 따라,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은 분명한 사실러 보인다. 적석총, 혹은 돌무지 무덤으로 불리는 이 피라밋 모양의 무덤들은 현재와는 형태가 다소 달랐다. 무덤위에 작은 사댱을 지어 놓고, 제를 올렸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데, 그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 기와 조각들이다. 즉 발해는 그들의 조상인 고구려의 역대 왕 묘소를 찾아가, 제를 올리고 섬겼던 것이다.


 



▲전고국양왕릉


 


 


 


<2011. 8. 2>


 

by 백운 | 2015/07/11 07:05 | 여행관련자료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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