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계(牛溪) 성혼(成渾)은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친구로 기호학파를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기호학파는 단순히 율곡 문인들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우계의 직전(直傳) 문인은 175명에 이른다. 이들은 율곡의 문인들과 중첩되기도 하는데, 재전(再傳)·삼전(三傳) 제자들 역시 율곡의 후학들과 밀접한 교유관계를 유지한다.

성혼(1535~1598)의 자(字)는 호원(浩原), 시호는 문간(文簡)이며 본관은 창녕이다.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5세 때부터 파주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성수침(成守沈)인데, 그는 조광조(趙光祖)의 제자로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벼슬길에 환멸을 느끼고 파주에 은거하여 거경(居敬)과 실천(實踐) 중심의 도학공부에 매진하였다. 우계는 아버지 성수침의 학풍을 이어 받아 본원을 함양하고 경의(敬義)에 힘씀으로써 내적 수양을 힘쓰는 한편, 실천의 공부를 중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는 벼슬을 사양하다가 후반기에 조정에 나아가 좌참찬과 좌찬성 등을 지냈다. 저서로 『우계집(牛溪集)』·『주문지결(朱門旨訣)』·『위학지방(爲學之方)』 등이 있다.

그의 철학사상을 보겠다. 그는 리기설(理氣說)에 있어 리(理)의 능동성을 주장하여 이황의 견해를 지지하였다. 그는 주자(朱子)의 ‘인심은 형기(形氣)의 사사로움에서 나왔고 도심은 성명(性命)의 바름에서 근원한다’는 말에 근거하여 리와 기가 모두 발한다고 보았다. 즉 마음의 세계를 인심-칠정-기, 도심-사단-리의 구도로 파악한 후, 리 또한 발한다고 보았다. 리의 능동성을 주장하는 그의 철학사상은 수양론에서도 드러난다.

그의 수양론을 보자. 그는 본원을 함양하기 위해 체찰(體察)과 체험(體驗)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인욕을 배제하고 천리를 함양하는 형식의 공부를 지향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함양으로 천리를 구현하는 공부는 이황(李滉)의 학풍과 유사한 점이 있다. 이는 그가 사단칠정론에서 리발설(理發說)을 인정하여 이황의 입장을 지지하는 모습에서 엿볼 수 있다.

그의 정치사상을 보자. 리발설을 인정하는 그의 학문적 시각은 정치사상에도 투여된다. 그는 물사(物事)와 리세(理勢)를 살피는 것을 중시하였다. 그래야만 임금이 임금다운 정치를 펼 수 있고, 또 이로써 백성들로부터 신뢰를 받을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리와 세가 서로를 필요로 하듯이 임금과 신하도 상호 협조를 하여야 덕업(德業)을 쌓고 치화(治化)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또한 민심(民心)과 천의(天意)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정치를 행해야 하는데, 그 구체적인 방법은 물사와 리세를 잘 살피는데 있다고 하였다.

그의 학문은 후인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발휘하였으며, 기호학파를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의 학풍이 가지는 학문적 특성을 보겠다. 우선 그는 절충적 태도를 가진다. 그는 율곡 이이와 퇴계 이황의 학설 중 어느 하나를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를 절충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점은 그의 후학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또한 우계의 학풍은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성향을 보이며, 은둔하여 자신을 닦는 성향을 보이며, 국난에는 절의사상을 발휘하여 구국에 앞장섰으며, 실천과 실상에 힘쓰는 무실사상(務實思想)을 견지하였다.

우계의 학문은 율곡과의 친분, 그리고 파주 지역을 삶의 근거지로 삼았다는 데서 기호학파의 형성에 자연스럽게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그는 학문적으로는 퇴계의 리발설을 지지하였다. 이러한 점은 기호학파의 학풍을 다양하게 만드는데 일조를 하였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