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서 이항노 (華西 李恒老)의 묘

                                        화서 이항노     華西  李恒老

 

 

 

 

 이항노(李恒老. 1792~1868) .. 조선 말기의 성리학자로 화서학파(華西學派)의 태두이다.

 

 

 

 

 

 

 

 노산사(蘆山祀)는 이항노가 숭모하던 주자(朱子)와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의 위패와 영정을 모셔놓은 사당이다.

 

 

 

 

 

 

 

 

 

 

 

 

 

 

 

 

 

 

 

 

 이항노는 스승없이 독학으로 학문의 일가를 이룬 선비이었다. 1808년 (순조 8)에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과거시험에 不正이 있고 관리로 진출하는 데에도 권모술수가 있음을 알고는 벼슬에 나가는 것을 단념하였다.

 

 

 

 

 

 

 

 

 그가 25세되던 1816년과 이듬해에 잇달아 부모를 여의고 나서는 오로지 학문에만 몰두하였고, 30세 무렵에는 그의 학문과 인품을 흠모하는 선비들이 그의 문하에 모여 들어 그의 강학(講學)을 들었다.

 

그는 때로 너무 많은 선비들이 모여들어 번잡함을 느끼게 되면 쌍계사 같은 산사를 찾아 사서삼경(四書三經)과 주자대전(朱子大全) 등 성리학연구에 매진하기도 하였다.

 

 

 

 

 

 

 

 

이항노의 학문이 점차 조정에 알려지면서 여러 차례의 부름을 받았으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1850년에는 휘경원 참봉(徽慶園 參奉)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고, 다른 벼슬도 마다한 채 이 곳 벽계에 머물며 오로지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만 전념하였다. 

 

 

매월 한차례씩 강론(講論)을 하는데 늘 100여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특히 의리(義理)에 관한 강론은 비유가 풍부하여 마치 용호(龍虎)가 뛰는 듯 통쾌하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한다.

 

 

 

 

 

 

 

 高宗이 즉위한 1864년에도 지평(地平), 장령(將令) 등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모두 완곡히 물리쳤다. 그러다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 )가 일어나자 그는 분연히 서울로 올라가 흥선대원군에게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하였다. 

 

 

이 "항거상소"로 이항노는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 곧바로 백성을 괴롭히는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과 조세제도(租稅制度)의 실정을 비판하고, 만동묘(萬東廟)의 재건을 주장하다가 결국 대원군의 노여움을 사서 관직을 물러 난 뒤 이 곳 고향으로 내려와 이듬해에 죽었다.

 

 

 

 

 

 

 

 

조선의 유학은 성리학을 주류로 하여 양명학(陽明學),경학(經學), 실학(實學) 등이 잇따라 등장하게 된다. 이 가운데  성리학은 크게 퇴계 이황(退溪 李惶)을 잇는 영남학파와 율곡 이이(栗谷 李珥)를 계승한 기호학파(畿湖學派)로 나뉘게 되는데..19세기에 이르면 중요한  학자를 중심으로 파(派)를 형성하게 된다. 

 

 

그 당시 유림(儒林)은 우두머리의 학문적 내용과 인적 구성을 바탕으로 기호(畿湖)계열의 화서학파(華西學派), 노사학파(蘆沙學派), 간재학파(艮齋學派)와 영남계열(嶺南系列)의 한주학파(寒注學派) 등 4개 학파로 나뉘어 있었다.

 

 

 

 

 

 

 

 

 이 중 화서학파(華西學派)의 태두인 이항노는 서구 열강문화를  미개(未開)한 이질문화(異質文化)라고 여기고 서구문화의 수용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다른 학파와는 달리 화서학파의 유생들은 개항(開港) 전후의 현실 대응론으로부터 일제시대 항일운동에 이르기까지 국권을 수호하기 위한 이론을 체계화하고, 우국충절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방법도 모색한다.

 

 

 

 

 

 

 

 

 그 당시 항일운동에 몸을 바친 많은 학자와 애국지사들 중에 화서학파 출신이 많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울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후 1906년 항일의병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군에 붙잡힌 뒤 일본 대마도에서 순절한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을 비롯하여 조선13도 의병도총제(義兵都總提)를 지낸 의암 유인석(懿菴 柳麟錫),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 학자인 증암 김평묵과 성재 유증교, 외세 배척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능지처참 당한  홍재학( 洪在鶴), 병인양요때 강화도에서 프랑스군을 대파한 양헌수(梁憲洙)장군,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白凡 金九)등이 이항노의 대표적인 제자들인 것이다.

 

 

 

 

 

 

 

 

 

 

 

 

 

 

 

 

 

 

 

 

 

                                           위정척사     衛正斥邪 

 

 

 

 

위정척사(衛正斥邪)란 조선 후기 유교적 질서를 보존하고, 외국 세력 및 문물의 침투를 배척하는 논리 또는 운동을 말한다.조선후기 문호(門戶)의 개방 이후 개화사상(開化思想)이 고조되고 정부의 개화정책이 외세의 침투에 주체적으로 대처하지 못한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어 주로 성리학(性理學)을 신봉하는 보수적인 유생들이 주도해 나갔다.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프라스함대의 강화도 침범) 당시에는 이항노(李恒老), 기정진(奇正鎭) 등이 서양세력의 침범은 국가 존망의 위기를 조성한다고 주장하면서 서양의 문물(文物)을 배척하고, 통상(通商)에 반대하였다.

 

 

 

 1876년 일본과 강화조약을 체결한 뒤에는 이항노의 제자인 면암 최익현(면암 최익현)이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을 내세워 개항(開港)에 반대하는 상소를 하였고, 척사(斥邪)의 대상에 日本이 추가되었다.

 

 

1880년 김홍집(김홍집)이 일본에서 들여 온 조선책략(朝鮮策略)을 보급시키면서 각 지방의 유생들이 격렬히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고, 정부의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정치적 움직임으로 확대되어 개화(開化)와 보수(保守) 두 세력의 대립과 갈등이 본격화되었다.

 

 

 

 

 

 

 

 

 

그 뒤 통상무역이 전개되고 미곡(米穀)수출이 진전되면서 농민층의 몰락이 가속화되자, 농민 몰락과 관련된 여러 원인을 제시하고 그 안정책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1894년~1895년 간의 갑오,을미(甲午,乙未)개혁을 계기로 개화파(開化派)때문에 나라가 망했다는 개화망국론(開化亡國論)을 편다.

 

 

 

그리고 개화파 정부와 일본세력에 대하여 대대적인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를 전후하여 君主의 결단에 호소하고, 정부에 건의하는 상소운동의 한계를 깨달으면서 일부는 항일의병(抗日義兵)전쟁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주체적인 근대화를 위한 방법론을 제시한것이 아니라, 조선왕조의 전통적인 정치체제와 사회,경제 질서를 그대로 유지시키려는 데 그 목적을 두었다는 점에서 전근대적(前近代的)인 성격이 강했으나, 국내의 현실적인 정치,사회의 문제의 개선 및 개혁을 포괄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by 백운 | 2011/04/07 17:06 | 태그 스크랩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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