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박원종의 묘 .. 인왕산 치마바위의 전설

                                    충렬공(忠烈公)  박원종(朴元宗)의 묘

           연산군을 쫒아 낸...누이인가? 딸인가?  그리고 인왕산 치마바위의 전설 

 

 

  

 

 

박원종(1467~1510)은 조선 연산군과 중종(中宗)시절의 무인(武人)으로 연산군을 쫒아내고 중종을 옹립하는 중종반정(中宗反政)의 일등 功臣,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되어 좌의정,우의정을 거쳐  32세의 젊은 나이에 영의정에 오른다.

 

 

 

그는  공신이나 현직 堂上官의 자제들에게 특혜를 주는 음보(蔭補...과거시험을 거치지 않고 관직 진출)로 武臣이 되며, 연산군과는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것으로 전해 내려 온다. 진위는?

 

 

 

즉, 박원종의 누나이자 연산군의 큰어머니인 월산대군부인 朴氏는 자식이 없는 恨을 연산군으로 달랬고, 연산군도 그를 무척 따랐다. 어느 날 박씨가 궁궐 안에서 잠이 들었는데 연산군이 들렀다가 임신을 시켰다는 것이다. 박씨는 수치심에  월산대군 묘 앞에서 자결하였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박원종은 연산군에 개인적인 원한이 깊었다고 하는데...글쎄..당시 박씨의 나이 60이 가까웠는데..

 

 

 

 

 

 

 

 

 

 

 조선 10대왕 연산군의 폭정이 날로 심해가자 성희안(成希顔), 유순정(柳順汀) 그리고 박원종(朴元宗)들이 연산군을 내쫒고 11대 中宗을 내세운다. 現 왕을 축출하고, 새로운 왕을 세우는데 성공한 처음의 일이었다.

 

 

 

처음에 이 계획을 생각한 사람은 성희안(成希顔.1461~1513)으로 박원종과는 친분이 없었으나 신윤무(辛允武)의 소개로 박원종을 만났지만 같이 일을 도모할만한 인물은 아니라고 판단하여 유자광(柳子光)을 불러 들였다.

 

 

 

세상에서 평가하기를 성희안은 결단성은 있으나 지모(智謨)가 없고, 유순정은 겁이 많아 적당치 못하였고, 박원종은 무장으로서 참모가 되지 못하며, 한편 유자광은 이 모두를 겸비하였다고 평한다. 하여튼 성공한 박원종은그 상으로 흥청(興靑..기생) 300명과 그들을 수용할 집까지 얻었다. 그 집은 대문,중문,소문 등 3개의 문을 거쳐야 집에 들어갈 수 있는 호화스러운 규모이었다고 한다. 대문마다 기생들이 머리에 꽃을 꽂고,  노란 저고리에 분홍치마를 입고 나와 손님들을 맞이하고 배웅하였다고 한다.

 

 

 

박원종은 왕보다 더 호사스런 생활을 누리며 약관 32세에 영의정이 되지만, 42세의 나이에 등창으로 죽었다.그의 묘 또한 일반 신하들의 묘와는 달리 규모도 크고, 호화스럽다. 다 이유가 있는 것...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

 

 

 

 

 그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별로 좋지 않다. 음애잡기(陰崖雜記)란 기록에 의하면.....박원종의 사람됨은 거칠고 사나웠으며 공부가 없어 연산군을 축출하고 공(功)을 기록하는데 자질구레한 친척까지도 모두 공신대우를 받았으며, 뇌물의 많고 적음으로 순서를 정하였다고 한다.

 

 

 

또한 신수근(愼守勤) 등 네 사람을 때려 죽일 때 피가 날려 얼굴에 가득하고, 입은 옷이 다 붉어졌으나, 그 功을 과시하고자 수일동안 낯을 씻지 않아 사람들이 이를 더럽게 여겼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거사 당일 현역 병졸이 없어 일꾼들을 부채를 들고 지휘하는데 그 형용과 행동이 마치 신(神)과 같았다고 한다.

 

 

 

 

 

 

 

 

 

 

 

 

 

 

 

 

 

                                                      신수근(愼守勤)......딸인가 ? 누이인가 ?

 

 

 

 

 

 

반정(反正)의 서두는 반대 세력의 제거임은 당연하다. 그 목표가 임사홍과 신수근이었다. 임사홍은 원래부터 연산군의 폭정을 도운 간신이었지만,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이자, 세자(후일 중종)의 장인이었다. 그가 왜 제거 대상이 되었을까?

 

 

 

반정 전야.. 박원종은 신수근을 찾아가 반정의 당위성을 알리고 협조를 구했다.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이기는 하였지만 세자의 장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높은 벼슬을 사양하여 명망있는 인물이었다.

더욱이 그는 연산군의 신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협조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었다.

 

 

 

제의를 받은 신수근은 화를 내며 반대한다.  비록 임금이 포악하다고는 하나, 세자가 총명하니 괜찮다는 이유이었다. 이 때 박원종은 교묘하게 신수근에게 말한다. 딸인가? 누이인가? 딸은 세자의 부인 곧 중종의 부인이고, 누이는 연산군의 부인이었다. 신수근은 그래도 협조를 거부한다. 불사이군(不事二君)...

 

 

박원종은 기밀이 발각될 것이 두려워 다음 날, 그를 수각교에서 살해한다.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먼저 죽인 사실...이방원이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죽인 것......많이도 닮았다.신수근은 이 역모 사실을 연산군에게 미리 알리지 않는다.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였는지? 또는 연산군의 축출에 행동으로는 참여 못하지만 심정적으로는 동조하였는지?  모를 일이다.

 

 

 

 

 

 

 

 

 

 

 

 

 

                                         인왕산 치마바위의 전설

 

 

 

 

드디어 중종(中宗)이 즉위한다. 따라서 신수근의 딸이 왕비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일주일만에 페비되어  인왕산 아래의 옛 거처로 유폐된다. 아버지인 신수근을 때려 죽인 박원종 등이 후환이 두려어 中宗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씨를 페비시키고 만다.

 

 

 

中宗은 곧 다시 왕비를 맞이하지만 페비된 신씨가 그리우면 경회루에 올라서 인왕산을 바라 보곤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신씨는 아침마다 인왕산 바위 위에 자신의 치마를 널어 놓고 저녁에는 걷어 두었다. 중종은 곧 신씨를 잊었지만 신씨는 70세에 죽을 때까지 51년 동안 계속 치마를 놓아 두었다고 한다. 그래서 치마바위이다.

 

 

 

 

 

 

                                              ( 경회루에서 바라 본 인왕산 치마바위)

 

 

 

                        신수근과 신씨는 후일 복위되어 신씨는 단경왕후로 추존되었다.

 

 

 

 

 

 

 

 

 

 

 

 

 

 

 

 

 

 

 

 

 

 

 

 

 

 

 

 

 

 

by 백운 | 2011/04/07 16:58 | 태그 스크랩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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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1234 at 2017/07/28 13:37
1234
Commented by 가짜충신박원종 at 2017/07/28 13:43
중종반정의1등공신박원종은
솔직히중종에겐진짜충신이아닌
가짜충신에불과했죠!겉으론충신
행세를하면서실제론자신이권력에
욕심을내면서그때부터자신의욕심을
채울목적으로당시진성대군(지금의중종)
을이용하여가장눈엣가시같은연산군을
폐위하고그를따르는기회주의자(임사홍.
신수근)들을없애버렸죠!자신이권력욕을
갖기위해서였으니까!솔직히박원종이야말로
권신노릇하는더러운간신배에가까운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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