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말생(趙末生)의 묘

  조말생(趙末生)의 묘.... 대마도를 정벌.. 그러나 高宗에 묘자리를 빼앗기다.

 

 

 

 

 

 

 조말생(趙末生 1370~1447)은 고려 공양왕때 태어나 조선 태종시절 과거에 장원 급제하며 총애를 받는다. 자는 근초(謹初), 호는 사곡(社谷) 또는 화산(華山)이다. 세종 시절 대제학 등을 지내나 병조판서 재직 시,  이종무장군을 보내 대마도(對馬島)를 정복한다. 

 

 

 

 

1492년(세종9) 조말생은 世宗의 명의로 된 국서(國書)를 왜국(倭國)에 보내 대마도(對馬島)는 경상도 계림(鷄林...지금의 경주)에 예속된 조선의 땅이라고 통보한다.

 

 

 

 

 

 

                                              조말생의 사당 (祠堂)

 

 

 

 

 

 

 

 

 

 

 

 

 

 

 

 

 

 

 

                                         고종에게 빼앗긴 조말생의 묘

 

 

 

 

 

조말생의 묘는 원래 이 곳이 아니었다. 지금의 홍유능(고종,순종의 능)이 있는 남양주 금곡에 있었다.   1926년 6월15일자 매일신보의 기사에 의하면.....

 

 

 

 

 

高宗은 대한제국을 산포하고 스스로 황제가 된다.  고종의 부인, 민비 명성황후(明成皇后)는 이미 일본군에 피살되어  청량리 홍능(洪陵)에 묻혀 있었으므로 高宗 자신도 세상을 떠나게 되면 홍능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고종은 홍능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든 지관(地官)을 동원하여 조선 팔도의 산맥과 지리를 살폈으나 마땅한 명당 자리가 없었다.

이에 고종은 새로운 지시를 내린다. 새로운 명당지지가 없으면 이미 산소자리를 쓴 곳이라도 찾아 보라고... 찾아 본 결과 지금의 남양주 금곡의 홍유능 자리이었지만, 이미 조말생의 묘가 있었다.

 

 

 

 

高宗은 趙末生의 후손을 불러 민비(명성황후)의 능침(陵寢..왕과 왕비의 묘자리)으로 양보하라고 말한다.  후손들은 종회(宗會)를 열고, 이 것만은 받아 들일 수 없다고 정하며 대궐 문 밖에 거적을 깔고 종친 일동이 복지대명(伏地待命)하는 탓에 고종도 어쩔 수 없었다.

 

 

 

 

 

 

 

 

 

 

 

 

 고종은 끝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조말생의 후손을 불러 " 그 곳이 그렇게 명당이라니 한번 구경이나 해 보자"고 하며 금곡으로 親行을 하여, 친히 산세와 지리를 살피니 과연 명당이었다.

 

 

 

 

명산이다...명당이다..극찬을 하며 이렇게 좋은 땅이니 혹시 무슨 기적이 있는지 땅을 파보자고 하여, 묘소 부근의 땅을 몇자 파보았더니 큰 돌이 나왔고 그 돌에는 " 오백년후이조능침지지(五百年後李朝陵寢之地) "라고 뚜렷이 새겨 있었다.  高宗이 미리 준비 해 놓은 것은 아닌지????

 

 

 

 

 

 

 

 

 

 

 

 

 

 

                                 대한제국 관보(官報) 1900년 9월 24일 

 

 

 

 

 

 

 

 

 

 

 

 

 

이 관보에서 금곡 안의 여러 묘소를 옮기도록 하고, 이에 대하여 후하게 대우하라는 고종의 조칙이 담겨 있다. 먼저 민비의 홍능이 이 곳으로 옮기고, 고종도 죽자 이 곳에 묻혔다.명당을 찾는 이유는?  결국 조선은 곧 망할  운명이었다.

 

 

 

 

 

 

 

 

결국 조씨 일문의 40여 묘는 이 곳 덕소로 옮기게 되었고, 고종은 이 일대를 사패지(賜牌地)로 조씨일가에 주었다. 이 곳은 원래 안동김씨의 영역 (석실서원 등)이었으나 흥선대원군의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척결로 가능했던 일이었다.

 

 

 

 

 

 

 

 

 

 

 

  高宗이 죽자, 당시의 일제(日帝)가 대마도를 정벌한 趙末生이 미워 그의 묘자리를 빼았고, 고종의 능침으로 정했다는 얘기가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高宗의 헛된, 부질없는 집착이었을 뿐...

 

 

고종은 사후 자신이 묻힐 곳과 장례법에 관심이 무척 많았다.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가 된 후, 중국으로 신하를 보내 명나라 태조의 황제능을 견학케 하고 스스로 묘역을 설계하며 수차례 수정 보완을 하게 된다. 그 일을 즐거워 했다고 전한다.

 

 

 

 

 

 

                                             왕릉과 황제능의 차이?

 

 

 

 

조선 전통의 정자각(丁字閣)을 없애고 침전(寢殿)을 세운다. 종래의 정자각 안에는 위패만을 모시고 이미 죽음을 기정사실화하였지만, 황제의 침전 안에는 용상과 침전을 배치하여 죽어서도 나라와 백성을 다스린다는 상징성을 부여하였다.

 

 

 

 

 

 

 

 

 

 

                                                왕릉과 황제릉

 

 

 

                    

                                                     

                                                          왕릉의 정자각...위패만 모셨다

 

                                                                                  ↓

 

 

 

 

            

                                           

                                       황제능..정자각 대신 침전(寢殿)...용상이 마련되어 있다

 

 

 

 

 

 

 

 

 

 

 

 

 

 

 

 

 

 양주 조씨 (楊州  趙氏)...2만여 명에 불과한 흔치 않은 가문이지만, 후손들의 결속력은 대단한 것 같다. 무슨 왕능처럼 꾸며 놓았다. 곡장에 문인석, 무인석 등등....

 

 

 

 

 

 

 

 

 

 남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좋은 전망... 풍수지리적으로는 모르겠지만.  좋은 산에는 절이, 좋은 곳에는 묘가 있다. 우리 땅에는...... 요즈음에는 별장이나 전원주택이 자리 잡을 곳..

 

 

 

 

 

 

 

 

 

 

 

 

 

 

 

 

견재 정선 (謙齋 鄭敾)이 1740년에 그린 석실서원도(石室書院圖).... 병자호란 당시의 김상용, 김상헌 형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석실서원이 있었던 곳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및 안동김씨 축출로 이 곳은 폐허화됐었으나, 금곡에서 옮겨온 조씨일문의 묘역이 되었다.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자리를 마련헀고, 그 아들인 高宗이 잘도 활용하였다..

 

 

 

 

 

 

 

 

 

 

 

 

 

 

 

 

 

 

 

 

 

 

 

 

 

 

by 백운 | 2011/04/07 16:52 | 태그 스크랩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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