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헌 조몽정 . 청주한씨 문정공파 묘역 신도비

보물 
대방광불화엄경소
  • 문 화 재 명 : 대방광불화엄경소권제21,24
  • 지 정 번 호 : 보물 제1128호
  • 소 재 지 :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 50 한국학중앙연구원
  • 지정년월일 : 1992.4.20
  • 규 모(格) : 2권 2첩 ( 32.4 × 10.6cm )
  • 저 자 : 징관(당) 술, 쟁원(송) 녹소주경
  • 소 유 자 : 국유
  • 관 리 자 : 한국학중앙연구원
  • 명예관리인 : 유시건
  • 자매결연단체 : 새마을지도자 운중동협의회
대불정다라니
  • 문 화 재 명 : 대불정다라니
  • 지 정 번 호 : 보물 제1129호
  • 소 재 지 :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 50 한국학중앙연구원
  • 지정년월일 : 1992.4.20
  • 규 모(格) : 1권 1점 ( 25.6 × 8.8cm )
  • 저 자 : 불공(당) 역
  • 소 유 자 : 국유
  • 관 리 자 : 한국학중앙연구원
  • 명예관리인 : 유시건
  • 자매결연단체 : 새마을지도자 운중동협의회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
  • 문 화 재 명 :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
  • 지 정 번 호 : 보물 제1130호
  • 소 재 지 :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 50 한국학중앙연구원
  • 지정년월일 : 1992.4.20
  • 규 모(格) : 1권 1책 (30 × 16cm)
  • 저 자 : 현장(당) 역
  • 소 유 자 : 국유
  • 관 리 자 : 한국학중앙연구원
  • 명예관리인 : 유시건
  • 자매결연단체 : 새마을지도자 운중동협의회
범망경노사나불설보살십지계품
  • 문 화 재 명 : 범망경노사나불설보살십지계품 제10-하
  • 지 정 번 호 : 보물 제1131호
  • 소 재 지 :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 50 한국학중앙연구원
  • 지정년월일 : 1992.4.20
  • 규 모(格) : 1권 1첩 ( 22.6 ×14.9cm )
  • 저 자 : 구마나십(후진)역
  • 소 유 자 : 국유
  • 관 리 자 : 한국학중앙연구원
  • 명예관리인 : 유시건
  • 자매결연단체 : 새마을지도자 운중동협의회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목판본
  • 문 화 재 명 :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목판본
  • 지 정 번 호 : 보물 제1132호
  • 소 재 지 :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 50 한국학중앙연구원
  • 지정년월일 : 1992.4.20
  • 규 모(格) : 2권 1책 (21.4 × 15.8cm)
  • 저 자 : 구마나십(후진) 역
  • 소 유 자 : 국유
  • 관 리 자 : 한국학중앙연구원
  • 명예관리인 : 유시건
  • 자매결연단체 : 새마을지도자 운중동협의회
정사공신조온사여왕지
  • 문 화 재 명 : 정사공신조온사여왕지
  • 지 정 번 호 : 보물 제1135호
  • 소 재 지 :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 50 한국학중앙연구원
  • 지정년월일 : 1992.7.28
  • 규 모(格) : 1폭 ( 전지 : 82.4 × 80.7cm, 납포 : 41.5 × 20.2cm )
  • 저 자 : 정종 하사문권
  • 소 유 자 : 국유
  • 관 리 자 : 한국학중앙연구원
  • 명예관리인 : 유시건
  • 자매결연단체 : 새마을지도자 운중동협의회
입학도설
  • 문 화 재 명 : 입학도설
  • 지 정 번 호 : 보물 제1136호
  • 소 재 지 :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 50 한국학중앙연구원
  • 지정년월일 : 1992.7.28
  • 규 모(格) : 1책 (33.3 × 19.2cm)
  • 저 자 : 권근 저
  • 소 유 자 : 국유
  • 관 리 자 : 한국학중앙연구원
  • 명예관리인 : 유시건
  • 자매결연단체 : 새마을지도자 운중동협의회

유형문화재

 봉국사대광명전
  • 문 화 재 명 : 봉국사 대광명전
  • 지 정 번 호 :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01호
  • 소 재 지 : 성남시 수정구 태평2동 216-2
  • 지정년월일 : 1980.6.2
  • 규 모(格) : 정면3칸, 측면2칸
  • 보 호 구 역 : 3,669m²
  • 소 유 자 : 봉국사
  • 관 리 자 : 봉국사주지 임종율
  • 명예관리인 : 윤건모
  • 자매결연단체 : 새마을지도자 태평2동협의회

봉국사는 영장산(靈長山) 서남쪽 기슭에 위치하며 대한불교 조계종의 말사이다. 1028년(고려 현종19)에 창건하였으며, 그 뒤 폐허가 된 것을 1395년(조선 태조4) 태조의 명으로 담화(曇華)가 중수하였다. 1674년(현종15)에는 요절한 현종의 두공주 명혜(明惠)와 명선(明善)의 명복을 빌기 위해 공주의 능 근처에 있던 이 절을 중창하게 하였는데, 당시의 역사를 맡은 승려는 금강산의 일축존자(日竺尊者)였으며 중창뒤 봉국사라고 하였다. 1924년 두창(斗昌)이 중수하였고, 1932년에는 주지 춘성(春城)이 서울 삼청동에다 이 절의 부속암자를 만들었다. 그 뒤 퇴락되어 폐허화된 것을 1958년에 비구니 법운(法雲)이 중수하였고, 1967년에는 혜성(慧星)이 삼성각을 신축하였으며, 1969년 4월에는 요사채를 신축하였다. 1974년 완전해체 복원하였다.

대광명전은 주존불로 목조아미타불을 봉안하고, 좌우협시로는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모신 불전이다. 경내에 남향하여 정면3칸, 측면3칸의 주심포계 맞배지붕 건물로 풍판이 있으며, 건물에 비해 지붕이 커서 외관이 장중하다. 자연석 기단에 놓인 고복형(鼓腹形) 초석위에 민흘림기둥이 세워져 공포가 결구되고 오량의 지붕가구가 짜올려져 있다. 쇠서의 장식적인 형태, 연봉과 봉황조각 등은 18세기 말의 수법을 보이고 있다. 원래의 지붕은 측면의 공포배열과 귀공포형태로 미루어 팔작형식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단 좌우에는 사자형태를 닮은 서수(瑞獸)가 있어 특이하다. 이 불전은 기단과 초석, 지붕 등 많은 부분이 수리되었으나 조선후기의 불전형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

화각장
  • 문 화 재 명 : 화각장
  • 성 명 : 한춘섭
  • 지 정 번 호 : 제29호
  • 소 재 지 : 중원구 금광1동 119
  • 지정년월일 : 1999. 10.18

화각은 화각(畵角), 화각(畵刻), 화각(花角), 화각(火角),등의 명칭으로도 불리어 진다. 우리나라의 화각은 쇠뿔을 얇게 갈아 투명하게 만든 판을 말하며, 이러한 화각을 이용해서 공예품을 만드는 사람을 화각장이라 한다. 또한 화각공예는 고려시대의 나전칠기와 쌍벽을 이루는 조선시대의 왕실 공예이며 한국적인 공예의 특성을 가장 뚜렷하게 나타내는 독특한 공예 기법이다.

재료가 귀하고 공정이 까로워 多생산이 많지 않았으므로 특권층의 기호품이나 애장품으로 이용 되었을 정도로 화각공예는 속이 비고 투명도가 높은 황소뿔을 삶아 압력을 가하여 종이처럼 얇게 펴서 갈아낸 다음 투명한 부분의 뒤쪽에 단청 안료로 갖가지 무늬나 그림을 그리고 채색하여 옻칠을 하여 아름다움을 가미하고 장식하여 만드는데 화각에 그리는 그림은 빨강, 파랑, 노랑, 검정, 흰색등 5가지 색을 기본으로 십장생을 비롯하여 사군자등 각종 상징물 및 자연물을 그려 넣어 만든는 공예다. 공예품으로는 장, 농, 사방탁자, 문갑, 예물함, 경대, 바느질자, 경상, 연상, 반짓고리, 부채, 붓대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화각공예는 다른 나라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민족적 색채가 짖은 민족공예로 발전되었다. 현재 무형문화재 화각장으로 전통을 계승해 나가는 한춘섭은 화각의 단점을 보완하여 화각공예의 기술을 계승 발전시키고 있다.

망경암마애여래좌상
  • 문 화 재 명 : 망경암 마애여래좌상
  • 지 정 번 호 :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02호
  • 소 재 지 : 성남시 수정구 복정동 553-1
  • 지정년월일 : 1980.6.2
  • 보 호 구 역 : 2,463m²
  • 소 유 자 : 망경암
  • 관 리 자 : 망경암주지 하종술
  • 명예관리인 : 박현규
  • 자매결연단체 : 새마을지도자 복정동협의회

서울이 내려다 보이는 빼어난 조망의 망경암의 자연암벽에 감실을 만들고 그안에 불상을 새긴것이다.
불상 주위에는 군데 군데 암석면을 고르게 다듬고 그 안에 명문을 새긴 곳이 14군데나 된다. 이곳은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걸쳐 임금이 친히 거동하여 나라와 백성의 안락과 수복을 빈 곳이라 한다.

또한 조선왕실에서는 세종의 아들인 평원대군과 제안대군의 명복을 빌기위해 칠성단을 만들어 칠성제를 지내며 이곳을 칠성대라 불렀다고 한다.
또한 고종 때에는 이규승이 1897(광무1)년에 관음상을 새기고 불사를 일으켰다는 명문(銘文)이 있다. 이 불상은 결가부좌한 좌상인데 왼손을 가슴에 대고 오른손은 항마촉지인 같이 무릎위에 놓은 모습이며, 양 어깨를 덮은 통견의 불의를 입고 있다. 그 외 양식이나 조각술등에 뚜렷한 특징이 없는 불상 자체도 그다지 우수한 것이 아닌 조선말기의 불상이다.

그런데 이 불상의 머리는 소발(素髮)이며 형식도 불상의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명문에 있듯이 1897년에 조성된 관음상이라면 절대연대를 가진 작품으로 주목된다고 하겠다.

대목장/도편수
  • 문 화 재 명 : 대목장/도편수
  • 성 명 : 장효순
  • 지 정 번 호 : 제36호
  • 소 재 지 : 수정구 신흥2동 516
  • 지정년월일 : 2001.11. 5

대목은 원래 궁궐이나 사찰, 가옥과 같은 것을 맡아 짓는 사람을 일컫는 말인데, 조선왕조시대에 이들의 조직을 보면 도편수(혹은 도대목)를 제일 대장으로 삼는다. 말하자면 이일을 총괄하는 우두머리로서 지을 집의 법식을 정하고 일의 분담과 기법을 지도하는 소임을 맡아 하기 때문에 요샛말로는 충분히 건축가에 견줄만 한 격조 높은 장인에 속한다.

특히 도편수의 경우 일의 시작은 통나무가 도착 하면서 부터 시작된다. 도편수가 통나무를 점검하여 그 크기와 생김새에 따라 여러 가지 명칭이 부여 되면서 따로따로 분류되어 쌓이게 된다. 분류된 통나무는 자귀질 만으로 다듬어지는 것이 있고 인거장(引鋸匠)에게 넘겨져 각재(角材)나 판재(板材)로 켜지게 된다. 켜내는 각재나 판재는 대목들의 소용 재목이 되고 또한, 문장의 문짝의 살대등을 깍는 소목들에게 돌아간다.

특히 도편수의 경우 일의 시작은 통나무가 도착 하면서 부터 시작된다. 도편수가 통나무를 점검하여 그 크기와 생김새에 따라 여러 가지 명칭이 부여 되면서 따로따로 분류되어 쌓이게 된다. 분류된 통나무는 자귀질 만으로 다듬어지는 것이 있고 인거장(引鋸匠)에게 넘겨져 각재(角材)나 판재(板材)로 켜지게 된다. 켜내는 각재나 판재는 대목들의 소용 재목이 되고 또한, 문장의 문짝의 살대등을 깍는 소목들에게 돌아간다.

현재 도무형문화재 대목장/도편수인 장효순은 전통 건축물을 복원 및 신축하는 일을 전승·발전 시키고 있다.

소목장/백골
  • 문 화 재 명 : 소목장/백골
  • 성 명 : 김의용
  • 지 정 번 호 : 제14호
  • 소 재 지 : 중원구 은행2동 651-6
  • 지정년월일 : 2002. 11. 25

소목장은 장롱을 비롯하여 문방제구등의 세간들과 때로는 각종 목물(木物), 다시말하면 가마, 수레, 농기구, 창호, 기타 도구류를 포함하여 만드는 사람을 일컫는다. 고대에는 목수를 재인(梓人), 재장(梓匠), 윤여(輪輿)라 했는데 이는 수레에서 생긴 중국식 명칭이다.

소목장이란 명칭은 고려때부터 나타나며 조각장(彫刻匠), 나전장(螺鈿欌)등과 더불어 중상서(中尙署)에 예속되어 있었다. 조선시대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괄하여 목장(木匠)이라 하였다. 그 대신 세분화하여 수레장, 선장(船匠), 통장(匠), 표통장(表筒匠), 마조장(磨造匠), 풍물장(風物匠), 안자장(鞍子匠), 목소장(木梳匠), 목영장(木纓匠)을 따로 두었음이 경공장의 전문직종으로 명시되어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가구나 그릇을 만드는 제목으로는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지형조건과 사계절이 뚜렷한 기후 조건에서 자라온 소나무, 자작나무, 대추나무, 흰노송나무, 밤나무, 버드나무, 가래나무, 호두나무, 오동나무, 피나무, 수창목, 감나무, 벚나무, 회화나무, 돌배나무등의 다양한 목재를 얻을 수 있었으며, 그 나무의 재질에 따라 골재(骨材), 판재(板材), 부재(附材)로 구분되었다.

골재는 구조상 힘을 받는 나뭇결이 견실한 목재로 소나무, 돌배나무, 회화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 호두나무등이 주로 쓰이고, 판재는 목리(木理)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기능과 용도에 알맞은 오동나무, 소나무, 전나무, 뽕나무, 은행나무, 느티나무, 살구나무등이 많이 쓰여져 왔다. 부재로는 회화나무라든가 수창목, 버드나무등 나뭇결이 치밀 하면서도 아름다운 수목이 주로 쓰여졌다. 이는 우리 조상들이 자연을 잘 이용 하고 그 속에서 아름다움을 간직하려고 했던 조상들의 현명함을 볼 수 있다.

우리시에 지정되어 있는 소목장 김의용은 백골 부문의 맥을 이어가는 소목장 기능보유자로 철저한 장인정신으로 전통가구의 맥을 잇고 있다.

매듭장
  • 문 화 재 명 : 매듭장
  • 성 명 : 정봉섭
  • 지 정 번 호 :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22호
  • 소 재 지 : 분당구 야탑동 264-3
  • 지정년월일 : 2006.11.16

매듭장이란 끈목(多繒)을 사용하여 여러 가지 종류의 매듭을 짓고, 술을 만드는 기술 또는 그러한 기술을 가진 사람을 가리킨다. 끈목은 여러 가닥의 실을 합해서 3가닥 이상의 끈을 짜는 것을 말하는데, 그 종류에는 둘레가 둥근 끈으로 노리개나 주머니끈에 주로 쓰이는 동다회와 넓고 납짝한 끈으로 허리띠에 자주 사용되는 광다회가 있다. 복식이나 의식도구 장식으로 사용되는 매듭은 격답·결자라고 한다.

매듭의 기원은 원시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으나 우리나라에 전승되어 오는 장식과 실용으로 삼았던 고유의 매듭 기법이나 염색법은 삼국시대에 중국을 통해 들어왔다. 조선시대에는 국가 소속의 매듭장이 있었다. 재료로는 명주실, 모시실, 닥나무실, 삼베실, 털실 등이 쓰인다. 끈의 색감, 굵기, 맺는 방법에 따라 형태가 다양하며 지방에 따라 그 이름도 다르다.
매듭의 이름은 생쪽, 나비, 잠자리, 국화 등 우리가 쉽게 보고 사용하는 온갖 물건, 꽃, 곤충에서 따왔다. 끈이나 매듭의 하단에 다는 것을 술이라 하는데 각종 악기, 교통용구, 불교 도구 등의 장식에 사용하였다. 술 또한 쓰임새에 따라 딸기술, 봉술, 호패술, 선추 등 다양하다. 같은 종류일지라도 궁중과 지방에 따라 그 품격이 달랐다.

매듭은 생활전반에 폭넓게 이용되었으나 개화기 이후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매듭장의 대(代)가 끊어질 위기에 처하하여 김희진과 최은순씨를 기능보유자로 인정하여 그 맥을 이었다.

나전칠기장/칠장
  • 문 화 재 명 : 나전칠기장/칠장
  • 성 명 : 배금용
  • 지 정 번 호 : 제24호
  • 소 재 지 : 수정구 태평2동 3317-1
  • 지정년월일 : 1998. 9.21

나전칠기가 언제부터 한국인의 생활에서 쓰이기 시작했는가 확실치 않으나 중국의 역사서에 보면 漢대에 칠기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낙랑고분에서 칠기가 출토되고, 신라의 관직제도에 칠전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삼국시대 이전부터 있었다고 추정된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 이후 나전칠기의 독자적인 기법으로 발전 전승되어 한때는 세계적인 기술을 자랑할 만큼 우수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고려 인종때 서긍이 저술한 『고려도경』에 고려 나전칠기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 기법은 매우 세밀하여 귀하게 여길만 하고 나전이 장식된 말안장도 매우 정교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나전칠기에 대한 문양도 시대적으로 구분되는데 조선초기인 15,16세기의 나전의장은 연당초문, 쌍봉문, 쌍용문, 보상화분등 고려시대의 섬세했던 것에 탈피하여 표현이 대담하며 활달하였고, 17,18세기경에는 기법이 다소 쇠퇴 하면서 점차 매죽, 화조등의 그림이 두드러지게 많아지고 사군자나 십장생등 문인화풍의 문양이 성행하였다.

조선 말기에는 자연을 소재로한 풍경화적인 묘사에 중점을 두어 십장생과 산수문등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수많은 나전장들이 그맥을 현재까지 이어가고 있다.
현재 도무형문화재 나전칠기장/칠장인 배금용은 나전칠기 제작에서 뛰어난 칠장으로 그 전통적인 기능을 전승·발전 시키고 있다.

금박장
  • 문 화 재 명 : 금박장
  • 성 명 : 김덕환
  • 지 정 번 호 :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119호
  • 소 재 지 : 분당구 정자동 237-16
  • 지정년월일 : 2006.11.16

'금박장(金箔匠)'이란 직물 위에 얇은 금박을 이용해 다양한 문양을 찍어내는 장인으로, 오늘날에는 여성의 혼례복 등에서 볼 수 있다. 금박장식은 조선시대에는 왕실에서 제한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보관상의 문제로 현존하는 유물이 많지 않으나 순조(純祖)의 3녀 덕옹공주(1822~1844)가 혼례 때 입었던 것이라고 전하는 원삼에는 '壽(수)'와 '福(복)'자가 금박 장식되어 있다 (중요민속자료 제211호 덕옹공주의복).

금박장식은 접착제를 바른 문양판을 문양을 넣고자 하는 위치에 찍고 접착제가 완전히 마르기 전에 금박지를 붙인 다음 문양 밖에 있는 금박지를 다시 떼어내는 방법으로 제작된다. 금박장 기술은 옷의 구성에 어울리는 문양을 선별 · 배치하는 안목을 바탕으로 문양판을 조각하는 목공예 기술과 주재료인 아교와 금박지의 물성을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오랜 제작경험을 바탕으로 완성되는 기술이다.

이러한 금박 장식기술은 우리나라의 독특한 직물 공예기술로 지난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김경용(金景用)을 보유자로 인정하였으나 보유자 사망으로 종목이 해제된바 있다. '금박(金箔)'은 금 조각[金片]을 계속 두드려 얇은 종이처럼 만들어진 것을 뜻하나 오늘날에는 금박지를 이용해 직물 등에 문양을 장식하는 기술로 이해되고 있어 지정명칭을 '금박장(金箔匠)'으로 명명하였다.

민속자료

 수내동가옥
  • 문 화 재 명 : 수내동가옥
  • 지 정 번 호 : 경기도문화재자료 제78호
  • 소 재 지 :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 84번지
  • 지정년월일 : 1989. 12. 29
  • 규 모 (격) : 안채 8칸, 바깥채 6칸 (전체 약500m²)
  • 보 호 구 역 : 1,480m²
  • 소 유 자 : 성남시
  • 관 리 자 : 성남시
  • 명예관리인 : 이선구
  • 자매결연단체 : 수내2동통장협의회

본 가옥은 분당구 수내동 84번지에 위치한 대지 200평 가량되는 한산이씨의 종가집 가옥이다. 이 일대는 총 70여호가 모여살았으며 그중 한산이씨는 30여호 가량되는 집성촌이었다 대부분의 가옥은 6.25 사변으로 전소되거나 파괴되어 후에 다시 복구하였으나 그 원형을 찾아보기는 어려운 상태였고. 다행히 본가옥을 포함한 3,4여호만이 피해를 면하였으나 후대에 많은 보수가 이루어져 그나마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집은 이 가옥이 이 일대에서 유일한 실정이다.

이 가옥의 정확한 창건연대나 연혁은 파악할 수 없으나 이 가옥에 살았던 이택구씨의 말에 의하면 증조부가 이곳으로 이사한 후 4대째 이곳에서 거주한것으로 미루어 대략 150-200년 가량된 집으로 추정할 수 있다.

현재는 분당의 중앙공원내에 위치하고 있는데 조선시대말기 경기도 지역의 전형적인 농촌가옥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중앙공원 정문 2호교를 지나 우측으로 따라들어가면 입구에서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2그루가 있고 그 옆으로 지름 20m 가량되는 타원형의 연못이 있으며 북쪽언덕에 마을전체를 굽어볼 수 있는 정자터가 있다.

이 정자는 과거에는 학문을 가르치고 마을의 어른들이 담소를 즐기던 마을서당을 겸한 정자였으나 해방이후 퇴락하여 허물어졌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의 형상이 거북과 같아서 거북의 머리되는 곳에 현재의 연못을 파서 물을 먹을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물을 취한 거북의 형세가 너무 좋아 날아갈듯하여 거북의 네 발되는 위치 에 비석을 세워 거북의 승천을 막고 마을의 수호를 기원하였다고 한다.

전체적인 집의 배치는 일자형의 행랑채와 'ㄱ'자형의 안채를 한 축좌말향의 전형적인 중부지방형의 배치구성을 하고 있다.

풍산군 이종린 묘역
  • 문 화 재 명 : 풍산군(豊山君) 이종린(李宗麟) 묘역
  • 지 정 번 호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7호
  • 소 재 지 : 성남시 분당구 하산운동 산41
  • 지정년월일 : 2005. 1. 28
  • 규 모 (격) : 1기
  • 보 호 구 역 : 13,162m²
  • 소 유 자 : 전주이씨 풍산군파 종회
  • 관 리 자 : 전주이씨 풍산군파 종회
  • 명예관리인 : 이용섭
  • 자매결연단체 : 운중동 새마을부녀회

풍산군(豊山君) 이종린(李宗麟, 1538~1611)은 중종의 손자이며 덕양군 이기(李岐)의 장남이다. 1581년 덕양군이 돌아가자 관례에 따라 정경(正卿)의 품계에 오르고 임진왜란 때에는 어가(御駕)를 호종하였다. 1607년 종1품 가덕대부(嘉德大夫)에 제수되고 1610년에는 소덕대부(昭德大夫)에 올라 왕실 종친부의 일을 관장하였고 사옹원제조와 오위도총부 도총관도 겸임하였다.

일반 사대부의 봉분이 보통 12폭의 병풍석을 두르고 문인석에도 5량관(粱冠)을 씌우는 데 비해 풍산군의 봉분은 큰 받침돌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8폭의 병풍석을 둘렀으며 문인석에도 7량관(粱冠)을 씌우는 등 왕릉이 아님에도 제왕의 예에 따라 매장한 특징이 있어 2005년 경기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청주한씨 문정공파 묘역 신도비
  • 문 화 재 명 : 청주한씨 문정공파 묘역 신도비
  • 지 정 번 호 : 경기도문화재자료 제84호
  • 소 재 지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율동 산 2-1
  • 지정년월일 : 1994.4.20
  • 규 모 (격) : 3기
  • 보 호 구 역 : 851m²
  • 소 유 자 : 청주한씨 문정공파 종회
  • 관 리 자 : 청주한씨 문정공파 종회
  • 명예관리인 : 한만중
  • 자매결연단체 : 새마을지도자 서현동협의회

한계희(1423∼1482)는 조선초기의 문신으로 시호는 문정이며 우승지, 좌승지, 공조참판, 이조참판, 이조판서, 좌찬성을 역임하였고 기내훈구파에 속하는 유학자로서 특히 세조의 신임을 받았으며 최항 등과 함께 경국대전 편찬에 참여했고 1447년(성종 8) 의방유취의 간행을 주관하였다.

신도비는 개석이 조선초기의 전형적인 양식이었던 화관석, 비신, 기대로 이루어졌고 화관석과 비신이 하나의 화강편마암으로 화강암인 기대에 꽂아 세우게 되어 있다. 규모는 화관석이 폭72cm, 두께23cm, 높이52cm이고 비신이 61×18×152cm 기대가 115×59×44cm이며, 총고 48cm이다. 신도비문은 서거정(1420∼1488)이 찬하고 안침이 전과 글씨를 썼다. 건립년대는 1483년(성종 14)이다.

한사문(1446∼1507)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시호는 공간이며 대사헌, 병조참판, 공조참판, 공조판서, 함경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고 중종반정에 공을 세웠으며 신도비는 총고 231㎝의 규모로 기대의 하부 앞.뒷면에는 각 4개와 2개의 구획을 나누어 그안에 안상문이 조각되어 있고 상부에는 연당초문이 조각되어 있다. 1508년(중종 3)에 세웠으며 신용개(1463∼1519)가 찬 하였고 신흠(1566∼1628)이 전과 글씨를 썼다.

한사개(1453∼1521)는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시호는 영흥이며 영흥부사와 해주, 광주, 진주 등의 목사를 역임하였다. 신도비 총고는 206.5㎝이고 관석의 전면에는 운문과 상단 중앙부에 초승달이 조각되어 있는데 신도비에 해와 달이 조각된 경우는 드물다. 김안로가 찬 하였으며 1521년(중종 16)에 건립하였다.

기념물

 이수선생묘
  • 문 화 재 명 : 이수선생묘
  • 지 정 번 호 : 경기도기념물 제54호
  • 소 재 지 : 성남시 분당구 궁내동 산17-1
  • 지정년월일 : 1980. 6. 2
  • 보호구역 : 20,000m²
  • 규 모 (격) : 225m²
  • 소 유 자 : 전주이씨 덕양군파종회
  • 관 리 자 : 전주이씨 덕양군파종회
  • 명예관리인 : 이승대
  • 자매결연단체 : 새마을지도자 금곡동협의회

조선중기의 인물로 1569(선조 2)년에 출생하여 1645(인조 23)년에 돌아가셨다. 자는 명원으로 중종임금의 후손이다. 이괄의 란때 공을 세우고 정묘호란 때 왕을 강도에 호종, 구천군에 봉해지고 오위도총관을 겸하였다. 69세에 소덕대부로 승진, 77세인 1645년에 남소문동 집에서 별세하자 현록대부에 추증되었다.

선생의 묘소는 1980년 기념물로 지정되었는데 묘역 아래에는 형인 구성군의 묘소가 있다. 묘는 부인 동래현부인 증군부인정씨의 묘와 쌍분으로 되어있고 봉분 가장자리에는 호석을 둘렀다. 봉분 앞에는 묘갈이 세워져 있는데 비좌는 방형이고 비신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으나 아랫부분이 많이 손상되었다.

비좌는 연화문이 조식되어 있으며, 비의 규모는 총높이 171cm, 비높이 150cm, 너비 66cm, 두께 21cm이다. 비문은 김집이 찬하였는데, 전면에 '소덕대부겸오위도총부도총관 증현록대부구천군지묘 동래현부인 증군부인정씨부구'라는 명문이 있다. 묘비앞에 상석 향로석이 갖추어져 있고 상석앞에는 장대석으로 단을 만들었다. 상석을 중심으로 전방의 좌우에 망주석과 문인석이 배치되어 있는데 높이는 각각 135cm, 205cm이다.

선생의 신도비는 대리석으로 제작하였는 바, 옥개는 팔주지붕형이며, 비좌는 방형으로 상 하 양층으로 나누어 안상을 조식하였다. 비의 규모는 총높이 290cm, 비높이 200cm, 너비 80cm, 두께 30cm이며, 비문은 이재가 찬하고 이승휘가 서 하였으며 이태현이 전액을 썼다.

 

전주이씨 태안군파묘역
  • 문 화 재 명 : 전주이씨 태안군파묘역
  • 지 정 번 호 : 경기도기념물 제118호
  • 소 재 지 :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 산33-1
  • 지정년월일 : 1989. 12. 29
  • 보호구역 : 2,584m²
  • 규 모 (격) : 2개지역 150여평
  • 소 유 자 : 전주이씨태안군파종회
  • 관 리 자 : 전주이씨태안군파종회
  • 명예관리인 : 이방우
  • 자매결연단체 : 정자동 한진7단지 노인회

본 전주이씨묘역은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 산11-1에 이팽수묘외 1기가 소재하였으 나 분당 신시가지 개발로 인하여 1991년 11월 23일 정자동 산33-1로 이장하였으며 산34-2에 이경인묘외 1기가 있다. 이경인묘는 정자말골 해발 90m 야산의 정동향 기슭에 위치해 있다.

이팽(방)수 묘

1520년(중종 15) - 몰년 미상, 종실, 본관은 전주, 무산군 이종의 제5남, 성종의 손자. 처음 정에 제수되고 임진왜란때 왕을 호종하여 호종공신에 녹훈되고 정의대부 태안군에 봉해졌으며 승헌대부 오위도총부도총관에 추증되었다.
묘는 약 70평으로 봉분은 쌍분으로 군부인 안산김씨가 좌측에 부장되어 있으며 석물로는 묘표1기, 상석1기, 향로석1기, 문인석2기가 있는데 재질은 모두 화강암이다. 묘표의 규모는 비신이 69*18*154cm, 기태가 85*53*34cm 이다.

이경인 묘

1575(선조 8) - 1642(인조 20) 문신. 본관은 전주 자는 극보, 호는 정촌 무산군 종의 고손, 화릉군 수혜의 손, 인원수 강의 자. 1610년(광해군 2) 음보로 내시교관에 제배되었고 1612년 인의로 옮겼다. 이듬해 강동현감으로 부임하였고 1616년(광해군 8) 개성도사, 1620년 우봉현감으로 이배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이후 상의판관, 함흥판관을 역임하였고, 1629년(인조 7) 지중추에 올랐다. 다음해 군기첨정을 거쳐 형조정랑이 되었으며 오위장을 지낸후 1640년(인조 18) 안산현감, 1641년 이천도호부사에 제수되었다.

묘는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에 있다. 묘갈은 1696년(숙종 22)에 건립 되었으며 기념물 제118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한편 그 묘소가 위치하고 있는 정자동은 이곳 탄천상류에 정자를 짓고 학문에 열중하였다고 하는 '정자터'와 그의 호인'정촌'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묘는 약 50평 크기이다. 석물로는 1696년(숙종 22)에 건립한 묘갈 1기를 비롯하여 상석, 향로석 각1기, 망주석, 문인석 각2기가 있다. 묘갈의 재질은 대리석으로 규모는 비신이 45 * 15 * 128cm, 기태가 79 * 57 * 20cm이며 기태의 평면에는 연화문이 측면에는 안상문이 조식되어 있다. 묘갈은 삼면비로 그의 선계와 관력이 음기되어 있는데 지은이와 글쓴이는 마모로 인하여 알 수 없다.

상석과 향로석은 화강암으로 142 * 80 * 30cm규모이며 망주석은 고 120cm이다. 문인석은 대리석재로 30 * 24 * 115cm 이다.

 

한산이씨묘역
  • 문 화 재 명 : 한산이씨묘역
  • 지 정 번 호 : 경기도기념물 제116호
  • 소 재 지 :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 산1-2
  • 지정년월일 : 1989. 12. 29
  • 보호구역 : 11,630m²
  • 규 모 (격) : 일원
  • 소 유 자 : 한산이씨 한평군파종회
  • 관 리 자 : 한산이씨 한평군파종회
  • 명예관리인 : 이승대
  • 자매결연단체 : 내정동 부녀회

이 묘역은 고려말 성리학의 거두 목은 이색의 후손인 한산이씨묘역으로 조선중기 부터 후기까지 조성되었다.
묘역은 영장산일대에 조성되어 있는데 이곳은 사패지 로서 동,서,북쪽에 한산이씨 묘역을 알리는 표석이 건립되어 있었으나, 그중 2기는 중앙공원내로 이전되었다.

정남향 묘역에는 토정 이지함의 조부로 봉화현감을 지낸 한원군 이장윤의묘를 비롯한 한성군 이질, 한평군 이지숙, 아천군 이증의 묘가 위치해 있고, 동남향에는 아천군의 아들로 임진왜란 때 순절한 충신 이경류와 정부인 횡성조씨, 이경류의 애마총 그리고 김제군수 이정용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또 남서향으로는 이장윤, 이질, 이지숙의 유사를 기록한 한산이씨삼세이하유사비를 비롯하여 이증신도비, 이정용신도비, 이경류정려비가 위치해 있다.
삼세이하유사비는 1722년(정종 2) 건립되었는데 비문은 후손 이병연이 지었고, 규모는 80 * 26 * 198cm이다. 이증은 자는 가겸, 호는 북애로 1589년(선조 22) 대사간으로 정여립의 모반 사건을 다스려 평난공신 3등에 올랐고 벼슬은 좌참찬에 이르렀다.

신도비는 1695년(숙종 21) 건립되었는데 비문은 정두경이 짓고 이진휴 가 썼으며 윤덕준이 전액을 하였으며 규모는 83 * 38 * 218cm이다. 이경류는 자는 장원 호는 반금으로 도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정려비는 1727년(영조 3) 건립되었다.

규모는 정려현액이 72 * 46 * 9cm이고 비신은 34 * 34 * 176cm이다. 이정룡은 자가 몽향으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신도비는 1728년(영조 4) 건립되었는데 이의현이 짓고 전진상이 썼으며 홍현보가 전액을 하였고 규모는 87*31*213cm이다.

 

천림산 봉수지
  • 문 화 재 명 : 천림산 봉수지
  • 지 정 번 호 : 제 179호
  • 소 재 지 : 수정구 금토동 산35번지 일원
  • 지정년월일 : 2002. 5. 3
  • 보호구역 : 9,287m²
  • 규 모 (격) : 333m²
  • 소 유 자 : 손대현등 8인
  • 관 리 자 : 성남시
  • 명예관리인 : 시흥동장

천림산 봉수는 현재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 산35번지 일원에 위치하고 있으며, 봉수의 형태는 동서방향을 장축으로 하는 장타원형이며, 전체의 둘레는 80m 정도이고, 동서의 길이는 33.6m, 남북의 길이는 12m이다. 그중 북쪽 방화벽의 길이는 30m이고 동쪽 방화벽은 16m이며, 남쪽 방화벽은 29.3m이다. 봉수대 내부의 전체면적은 333m²(100평)정도 이다. 조선초기 봉수의 전형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천림산봉수는 현존하는 봉수 중에 규모가 가장 크며, 구조적으로 가장 완벽한 5개조 연조와 방화벽 및 담장지등을 갖추고 있는 봉수로서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

조선시대 5로거 봉수 노선중 2로거 내지봉수 직봉으로 용인 석성산 봉수에서 신호를 받아 서울의 목멱산(現 남산)봉수에 신호를 전달하는 경기도 관내의 마지막 봉수로 천림산에서 용인 석성산 봉수와는 18.75km, 서울 목멱산 봉수와는 16km 거리에 위치해 있다.

천림산 봉수의 명칭은 穿川山(천천산) → 穿川峴(천천현) → 月川峴(월천현) → 天臨山봉수(천림산)등으로 4차례 변경되었다. 그리고 천림산봉수에 근무하였던 봉수군의 인원과 관련 하여서는 『重訂 南漢誌』봉수조에 烽軍 25명, 保 75명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여타의 다른 봉수와 마찬가지로 봉군 5명이 조를 이루어 5교대로 월 평균 6일씩 근무하였으며, 봉군보 75명은 실제 근무를 하지 않는 대신 근무를 서는 봉군에 대한 경제적인 지원을 하였으며, 봉군 1인당 봉군보 3인이 배치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봉수제도는 전신전화 도입과 함께 고종 31년(1894년)폐지 되었다.

 

이경석선생묘
  • 문 화 재 명 : 이경석선생묘
  • 지 정 번 호 : 경기도기념물 제84호
  • 소 재 지 :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 51
  • 지정년월일 : 1985. 9. 20
  • 보호구역 : 2,240m²
  • 규 모 (격) : 303.1m²
  • 소 유 자 : 전주이씨 백헌공파종회
  • 관 리 자 : 전주이씨 백헌공파종회
  • 명예관리인 : 이현주
  • 자매결연단체 : 새마을지도자 운중동협의회

조선중기 문신으로 1595(선조28)년에 태어나 1671(현종 12)년에 돌아갔다.
본관은 전주 호는 백헌으로 덕천군의 후손이며 김장생의 문인이다.

선생은 1613(광해군 5)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623(인조원년)에 알성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1626(인조 4)년에는 문과중시에 장원하여 사가독서하였으며 1636(인조 14)년 병자호란 때는 부제학으로 삼전도비문을 찬진 하기도 하였다. 이후 대제학, 이조판서를 지내고 1642(인조 20)년에는 세자의 이사로 척화를 주장하다가 김상헌과 함께 심양의 봉황성에 끌려갔다. 1645(인조 23)년에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역임하였으며 1659(효종 10)년에 영돈영부사가 되어 기로소에 들어갔다.

현종이 즉위하여서는 남인으로 송시열 등의 서인에게 배척되기도 하였으나 왕의 총애로 유임되었으며 1668(현종 9)년 궤장을 하사받았다. 경기도청 향토사료실에 소장되어 있는 사궤장과<사궤장연회도첩>이 보물 9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시호는 문충으로 남원의 방산서원에 제향되었으며 문집인 "백간집"이 현존하고 이정구, 이명한, 정광성의 비문을 쓰기도 하였다. 묘는 청계산의 서남쪽 구릉인 성남시 석운동 대감능골에 있으며 2단의 사성으로 후면을 정리하였고 봉분앞에는 장대석을 쌓아 기단을 조성하였다. 묘역은 약 100 여평으로 석물은 묘갈, 장명등, 상석 각1기, 망주석, 문인석, 신도비 각2기가 있는데 장명등과 신도비 1기는 최근에 조성한 것이다.

묘갈은 1751(영조 27)년에 건립되었는데 재질은 대리석이다. 전면에는'유명조선 국영의정문충공백헌이선생경석묘정경부인전주유씨부좌'라 쓰여있어 정경부인 전주유씨가 부장되었음을 알수 있고 후면의 갈문은 현손 광회와 광사가 각각 짓고 썼다. 규모는 비높이 162cm, 너비 53cm, 두께 22cm이다.

신도비는 묘역입구에 신구비 2기가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비문은 박세당이 짓고 이광사가 쓰고 전액을 하였으며 1754(영조 30)년에 건립되었으나 판독이 불가능할 정도로 마모되어 1975년 신비를 개수하였다. 신비는 화강암이며 규모는 총높이 475cm,비높이 259cm,너비 84cm,두께 40cm이다.

 

둔촌 이집선생묘
  • 문 화 재 명 : 둔촌 이집선생묘
  • 지 정 번 호 : 경기도 기념물 제219호
  • 소 재 지 :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 243-1
  • 지정년월일 : 2008. 05. 26
  • 보호구역 : 40,693m²
  • 규 모 (격) : 1기
  • 소 유 자 : 광주이씨대종회
  • 관 리 자 : 광주이씨대종회
  • 명예관리인 : 이용순
  • 자매결연단체 : 하대원동 새마을부녀회

고려 충숙왕 14년(1327)인 정묘년에 출생하여 고려 충목왕 3년인 정해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해박한 학문과 고상한 지절로 이름이 울려 퍼지니 포은 정몽주, 목은이색, 도은 이숭인과 같은 여러 명헌들도 모두 존경하며 교류하였다.

공민왕 17년인 무신년에는 신돈을 오역<나무라고 거스린다는 말> 한 까닭에 앞으로 반드시 닥쳐올 화를 미리 예측하고 노부를 업고 도망하여 과거동기인 영천 최원도의 집에서 은거하다가 공민왕 18년인 기유년에 부친의 상을 당하여 서러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면서 영천군 나현자좌에 안장했다.

공민왕 이십년인 신해년에 신돈이 실각된 후에야 비로소 송경 용수산 밑 현화리 옛집으로 돌아왔다. 뒤에 벼슬을 버리고 여주 천령현으로 낙향하여 많은 은둔지사들과 교류를 하였다.

우왕 13년인 1387년에 사망하였다. 벼슬은 봉순대부 판전교사사를 지냈으며 조선조에는 의정부좌찬성의 직을 내렸다. 시고 2권이 전하여지고 있다.
조선현종10년(1669)에 여러사람들이 그 유덕을 추모하여 광주암사 강상에 서원을 세우고 춘추로 제향을 모시러 오더니 숙종 정축(1697)년에는 구암서원이라는 액자가 하사되었다.

 

향토유적 

경헌 조몽정 묘역
  • 문 화 재 명 : 경헌 묘역
  • 지 정 번 호 : 성남시 향토유적 제5호
  • 소 재 지 :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 산32
  • 지정년월일 : 2002. 12. 16
  • 보호구역 : 893m²
  • 규 모 (격) : 묘 1기(석물 포함)
  • 소 유 자 : 창녕조씨태복경공종회
  • 관 리 자 : 창녕조씨태복경공종회
  • 명예관리인 : 조영돈
  • 자매결연단체 : 서현동새마을지도자협의회

경헌 조몽정(1535∼1593)선생은 효자로 본관은 창녕, 자는 응길, 호는 경헌으로 첨지중추부사 등의 증손, 강원도관찰사 한필의 손, 호조좌랑을 지낸 언박의 자이다.

11세 어린 나이에 부친상을 당했으나 어른들처럼 묘 아래에 제실을 짓고 수묘의 정성을 다하였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에 사당의 신위를 받들고 피난하였는데 난 중이라도 어머니를 위하여 계절에 맞는 음식과 의복을 준비해 드릴 정도로 효성이 지극하였다. 향시에 응시하여 여러차례 추천되었으나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관직에 나가지 않는다는 지조를 지켜 벼슬하지 않았다.

묘역은 분당구 서현동 산 32번지에 있으며 오랜 세월동안 봉분이 깎이고 석물과 비석 등이 마모 및 파손되어 보존상태가 좋지 못하나 옛 형태를 대체로 간직하고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정일당 강씨 묘
  • 문 화 재 명 : 정일당 강씨 묘
  • 지 정 번 호 : 성남시 향토유적 제1호
  • 소 재 지 :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 청계산 산75
  • 지정년월일 : 1986. 3. 4
  • 보호구역 : 500m²
  • 규 모 (격) : 높이 1.5m, 둘레 15.5m
  • 소 유 자 : 파평윤씨 28세 단제공파종회
  • 명예관리인 : 윤황
  • 자매결연단체 : 새마을지도자 시흥동협의회

1772년(영조 48) - 1832년(순조 32), 조선후기의 여류문인, 본관은 진주, 호는 정일당, 제천출신, 아버지는 재수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로 서응의 딸이다. 윤광연의 부인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20세에 출가 한뒤 집이 가난하여 바느질로 생계를 이으면서도 남편을 도와 함께 공부하였다.

경서에 두루 통하였으며 시문에 뛰어나 당시에 문명이 높았다. 시는 대개 학문 또는 수신에 관한 내용이 많다. 또 글씨에 능하여 홍의영, 권복인, 황운조등의 필법을 이어 받았으며, 특히 해서를 잘 썼다. 사람들이 그의 남편에게 글을 청하면 대신 지어주는 일이 많았다. 이직보가 그의 시 한수를 보고 매우 칭찬하였는데 이 소문을 듣고 저술을 일체 남에게 보이지 않았다.

저서로는 <정일당유고> 1책이 있고 또한 시문집 1책, 신연활자본, 1836(헌종 2)에 간행된 초간본과 1926년에 간행된 중간본이 있다. 규장각도서관에는 필사본이 있으나 간행본과 편차가 틀려 대본을 알 수 없다.

권두에 윤제홍의 초간서문과 김창석의 중간서문이 있고 말권에 송치규, 윤수경의 초간발문과 김석곤의 중간발문이 있다.

시 38수, 명 5편, 서 10편, 기 3편, 설 1편, 제발 2편, 묘지명, 행장, 제문 각3편, 잡저 1편, 부록으로 행장, 묘지명, 제문, 뇌문, 만장, 이시발, 필첩발, 추만소발, 전, 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시는 대개 학문 또는 수신에 관한 것이 많다. <원운> 은 늙어가는 자신을 생각하며 인생의 원리를 읊은 것이며 <제석감음>에서도 51세가 되는 감회와 마음을 닦으며 남은 여생을 보내겠다는 신념을 말하고 있다. <성경음>에서는 수신의 도리를 표현하였고, <청추선>에서는 초가을 매미소리를 들으며 심란한 여심을 읊고있다.

시의 대부분이 문사의 수식보다는 고상한 심사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서는 남편과 주고받는 서찰이 대부분이며 그밖에 남편을 위한 대작으로 송치규에게 보낸 별지가 있다.

별지에서는 심의, 제주, 초반등에 관한 예설을 묻고있다. 잡서<사기록>은 11대 시할아버지로부터 시아버지까지 좋아하였던 음식을 적은 것들이다.
특히 정일당은 시어머니 지일당 전씨와 시로써 대화를 주고 받은 일화로도 유명 하며 저서에 '정일당 유고'가 전해온다. 분묘는 남편 윤광연과 합장되어 있는데 묘비 하나없이 전해오던 것을 성남시에서 1986년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하고, 2000년 2월 파평윤씨 문중의 협조를 받아 사당과 묘지를 재조성한 것으로 정일당의 지극한 효성과 높은 뜻을 기리고 있다.

 

연성군 이곤 묘비
  • 문 화 재 명 : 연성군(延城君) 이곤(李坤) 묘비
  • 지 정 번 호 : 성남시 향토유적 제6호
  • 소 재 지 : 성남시 분당구 판교동 산25-1
  • 지정년월일 : 2004. 10. 25
  • 보호구역 : 12,908m²
  • 규 모 (격) : 1기
  • 소 유 자 : 연안이씨 연성군파 종회
  • 관 리 자 : 연안이씨 연성군파 종회
  • 명예관리인 : 이정범
  • 자매결연단체 : 판교동 새마을부녀회

연성군(延城君) 이곤(李坤, 1462~1524)은 조선초기 문신으로서 자는 자정(子靜), 호는 녹창(祿窓)이다. 1492년 문과에 급제한 후 중중반정 때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녹훈되고 연성군에 봉해졌다. 첨지중추부사, 밀양부사 등을 지냈으며 관압사(管押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연성군 이곤의 묘비는 비두와 비신이 함께 조각된 통비석으로 비두의 전면에 구름무늬와 수평선의 파도무늬를 넣고 바다가 보이는 일출광경을 조각하였으며 태양안에는 삼족오(三足烏)를 새겨 넣었다.

삼족오(三足烏)는 고대 동북아에서 신성시되던 상징물인데 특히 고구려인들이 천손(天孫)의식을 나타내기 위하여 신성시하고 즐겨 표현하였으므로 해뜨는 동방의 나라 즉, 한민족을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다.

연성군의 묘비와 같이 비두에 삼족오 문양을 새겨 넣은 사례는 성남에서는 유일하며 전국적으로도 희귀하여 역사적으로 귀중한 자료이다.

 

송산 조견선생묘
  • 문 화 재 명 : 송산 조견선생묘
  • 지 정 번 호 : 성남시 향토유적 제3호
  • 소 재 지 : 성남시 중원구 여수동 산30
  • 지정년월일 : 2001. 2. 20
  • 보호구역 : 13,941m²
  • 규 모 (격) : 묘 1기(석물16점 포함)
  • 소 유 자 : 평양조씨송산공종회
  • 관 리 자 : 평양조씨송산공종회
  • 명예관리인 : 조재춘
  • 자매결연단체 : 하대원동새마을협의회

송산조견선생(1351~1425)은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평양이고 초휘는 윤이고 자는 거경이며 호는 송산, 시호는 평간공이다.

조선왕조가 개국하자 선생은 통곡하며 두류산(현 지리산)으로 들어가 이름을 견으로 자를 종견이라 바꾸었고, 조선조 태조가 선생의 절개를 찬양하고 재주를 아껴서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청계산으로 은거하여 망경대에 올라 고려 송도를 바라보고 통곡하며 생을 마감한 인물로 전해져 오고 있다.

벼슬은 고려조에는 지신사와 안렴사에 이르렀고 조선조에는 벼슬이 상장군 개국공신, 지중추원사, 평성부원군들을 제수 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다만 조선초기에 관직을 제수한 기록과 조선중기에는 고려조의 충신으로 인정받은 기록이 있어 행적에 대한 이견이 있으나, 본 묘역은 여말선초의 사대부 묘제를 가지고 있고 석물(묘표, 문인석, 석등 등)이 600년 된 묘역으로 고려말 조선초기의 묘제를 알수있는 유적이다.

특히 묘역주변에는 선생의 자손묘가 소재하는데 묘 형태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묘 형태를 한곳에서 볼 수 있는 곳이다. 선생은 양주 수락산 기슭의 한 마을( 현 의정부 송산마을)에서 75세에 생을 마감하였고, 후세에 선생의 호를 따서 송산이라 부르고 살던 터에 유허비를 세우고 지역사람들이 송산사(경기도문화재 제42호)를 중건하고, 양주에도 정절사(사천서원)을 세워 남을진, 조견 두분을 모시고 사림들이 매년 제사를 올리고 있고 , 공주에도 선생의 신주를 모신 송산사우(공주시 향토유적 제8호)가 있다.

 

광주이씨 묘역
  • 문 화 재 명 : 광주이씨 묘역
  • 지 정 번 호 : 성남시 향토유적 제7호
  • 소 재 지 :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 산3-1번지 일원
  • 지정년월일 : 2006. 3. 27
  • 보호구역 : 119,007m²
  • 규 모 (격) : 9기
  • 소 유 자 : 광주이씨 대종회
  • 관 리 자 : 광주이씨 대종회
  • 명예관리인 : 이해재
  • 자매결연단체 : 하대원동 새마을부녀회

성남시 향토유적 제7호인 하대원동 일대 광주이씨 묘역은 둔촌(遁村) 이집(李集)선생의 자손들 묘역으로 인물들의 史蹟과 함께 조선전기 묘역으로써 문화재적 가치를 지닌 성남시의 향토유적이다.

묘역 중 하대원동 산3-1번지에는 둔촌선생의 아들로 포은(圃隱, 정몽주) 문하에서 修學하고 탄천선생으로 불린 탄천(炭川) 이지직(李之直, 1354~1419)과 부인 경주이씨, 遁村선생의 증손으로 좌찬성(左贊成)을 지낸 광원군(廣原君) 이극돈(李克墩, 1435~1503)과 그의 아들 감사공(監司公) 이세정(李世貞, 1461~1529)의 묘소가 있으며, 하대원동 산7-1번지 외 묘역에는 둔촌선생의 손자 사인공(舍人公) 이장손(李長孫, 1390~1429), 증손 참의공(參議公) 이극규(李克圭, ?~?), 둔촌선생의 6대손이며 임진왜란 때 관서부원수(關西副元帥)로서 왜군과 싸운 장렬공(壯烈公) 이윤덕(李潤德, 1529~1611), 둔촌선생의 8대손으로 강계부사(江界府使)를 지낸 후 정묘호란 때 안주성(安州城)에서 전사하여 안주(安州) 충민사(忠愍祠)에 배향(配享)된 충민공(忠愍公) 이상안(李尙安, 1575~1627)의 묘소가 있다.

또한 산18번지에는 탄천선생의 셋째아들인 관찰사공 이예손(李禮孫, ?~1459)의 묘소가 있고, 산33-2번지 일원에는 탄천선생의 손자이자 관찰사공 이예손(李禮孫)의 아들인 참판공(參判公) 이극기(李克基, 1426~1491)의 묘소가 있다.

 

금릉 남공철묘역
  • 문 화 재 명 : 금릉 남공철묘역
  • 지 정 번 호 : 성남시 향토유적 제4호
  • 소 재 지 :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 산66
  • 지정년월일 : 2002. 12. 16
  • 보호구역 : 832m²
  • 규 모 (격) : 묘 1기(석물 포함)
  • 소 유 자 : 의령남씨충경공종회
  • 관 리 자 : 의령남씨충경공종회
  • 명예관리인 : 남선우
  • 자매결연단체 : 시흥동새마을부녀회

금릉 남공철(1760∼1840)선생은 조선후기 정치가·문장가이며, 본관은 의령, 자는 원평, 호는 사영·금릉이며 시호는 문헌이다. 아버지는 대제학을 지낸 유용이다. 1817년 우의정에 임명된 뒤 1833년에 영의정을 그만 둘 때까지 14년간 재상을 역임하였다.

그는 평소 독서를 좋아하여 경전에 통달하였고, 구양수의 문장을 올바른 법도라하여 가장 존중하였다.

순조 · 익종의「열성어제」를 편수하였고, 저서에「고려명신전」, 시문집으로「귀은당집」·「금릉집」·「영옹속고」·「영옹재속고」·「영은문집」등 많은 신도비와 비갈을 남긴 당대 제일의 문장가였다.

묘역은 수정구 금토동 산 66번지에 있으며 원형의 봉분은 용미와 활개가 없으며,영의정의 지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인석과 신도비를 갖추지 채 검소하다.봉분과 석물은 옛 형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특히 비석은 당나라 '안진경체'를 집자하여 제작한 것이며, 서예사의 '전사자체' 창안자로서 금석학에 귀중한 자료가 될 정도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신종군 이효백 묘역
  • 문 화 재 명 : 신종군 이효백 묘역
  • 지 정 번 호 : 성남시 향토유적 제8호
  • 소 재 지 :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 임50-8, 15-12
  • 지정년월일 : 2008. 9. 17
  • 보호구역 : 9,152m²
  • 규 모 (격) : 2기
  • 소 유 자 : 전주이씨 덕천군파 신종군 종회
  • 관 리 자 : 전주이씨 덕천군파 신종군 종회
  • 명예관리인 : 이동주

성남시 향토유적 제8호인 분당구 석운동에 위치한 이효백(1422~1487)의 묘역은 조선전기 묘역으로써 역사적 가치를 지닌 성남시의 향토유적이다.

신종군(新宗君) 이효백(李孝伯)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희삼(希參)으로 조선조 제2대 정종대왕의 제10왕자 덕천군 후생의 장남으로서 궁술(弓術)이 비상하여 ‘태조의 신궁’이라고 불린 무인으로 궁술에 관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여러 번 나와 있으며, 묘역 또한 활과 관련 있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묘역은 묘표, 상석, 문인석 한 쌍 등의 석물을 갖추고 있으며 묘표는 전후 2면에 있고, 앞면의 비문은 마모가 심하다. 건립연도는 1504(연산군 10)년이다.

 

남한산성

이 산성은 온조때 하남위례성에 말갈족의 침입이 있으므로 청량산을 중심으로 고지대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요새지인 이곳으로 온조 14(BC5)년 천도하였으며 신라 영역이 된 후로 문무왕 12년 토성으로 축성하고 주장산 또는 일장산이라 하였다.

조선조에는 광해군 13년에 처음 남한산성을 경도 보장지로 정하고 후금의 침입을 막고자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하기 시작한것을 이괄의 난을 치르고 후금의 위협이 증가하므로 인조2년 수어사 이서에게 명하여 수축케 하였다.

축성에는 벽암(각성)대사도 도총섭에 임명되어 팔도승군을 동원하여 축성공역에 임하였으며 2년만인 인조 4년에 준공되었다. 그후 숙종때 외성을 축조하는 등 성의 시설물이나 성내의 영조물 조영은 조선말 순조때까지 계속되었다.

성의 전체적인 형태는 성곽의 주변부가 높고 험악한 데 비해 성의 중심부가 낮고 평평한 평지를 이루어 수비가 용이하고 성내의 주거가 평안하여 산성으로는 좋은조건이라고 할수 있다. 성은 본성과 외성으로 구성되었으며, 둘레는 9.05Km이고 높이는 3m ~ 7.5m이고 4장대 (서장대만 존재), 4문, 5옹성, 16암문, 2봉화대가 있고 성내에는 군포 125, 지당 45 정호 80, 수대 8개소가 있었다. 유사시에는 임금이 기거할수 있도록 행궁을 비롯하여 종묘, 사직, 관아 재옥, 객사, 종각등이 있었으나 현재 남아있는 것은 없다.

사찰은 축성전부터 망월사, 옥정사가 있었으나 천주사, 한흥사, 장경사, 동림사를 지어 모두 9개 사찰이 있었으며, 현재는 장경사, 망월사, 개원사, 국청사를 복원하여 4개의 사찰이 있다.

성내의 저정된 문화재로는 성곽이 국가사적 57호로 지정되었고 경기도 지방 유형문화재로 수어장대, 청량당, 숭열전,현절사, 침괘정, 연무관, 문화자료 지수당, 장경사 기념물로는 망월 사지, 개원사지 등이 있다.

이 성은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45일간 항전하던 곳이며 비록 스스로 항복하였으나 외침에 의하여 정복당한적이 없는 성이다.

최근에 1300년전 통일신라 성곽과 무기창고(초대형기왓장)가 발굴되여 학계에 주목을 받고있다.

자료출처/ 경기도 성남시청

by 백운 | 2010/06/02 13:56 | 감동글 사진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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